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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크릿 세이 Jan 05. 2024

슬픔의 근원

무의식 해체 과정 ㅣ 다섯 번째 시간 - 2

       슬픔이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상실감이다.

       슬픔의 원인외부에 있기 때문에

       슬픔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감정 p146. 최현석-



담소 : 사람들은 각자 웃음 포인트가 있는 것처럼 슬픔 포인트도 있는 것 같아요. 상담 첫째 날 HTP 무의식 검사를 통해 나의 슬픔 포인트를 발견한 것이 신기했어요. ‘나의 의지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나무가 절단될 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큰 슬픔이 밀려왔죠. 한편으로는 나무가 절단되는 것에 주체할 수 없는 큰 슬픔을 느끼는 나 자신이 의아하기도 했어요. 의아함이 호기심으로 발전해서 다른 사람은 어떤 슬픔 포인트가 있는지 조사해 봤어요.


“나무가 만약 슬프다면
슬픈 이유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남성 A : 나무가 말라비틀어졌을 때 슬플 것 같다. 주변으로부터 양분공급을 받지 못한다. 주변과 연결이 끊어져 있다는 것이 슬플 것 같다.


남성 B :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슬플 것 같다. 나 말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슬플 것 같다.


남성 C : 나무가 움직일 수 없어서 슬플 것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닿지 못하니까. 움직일 수 없다는 제약은 결국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남성 D : 밑동만 남겨지고 버려지는 게  슬프다.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무의 효용가치가 없어졌다는 것이 슬플 것 같다.


여성 E :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슬플 것 같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 무엇도 없다는 사실이 슬플 것 같다.


여성 F :  주변에 있는 것을 보지 못했을 때 슬플 것 같아.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주변에는 새도 있고, 벌레도 있고, 바람도 있고, 공기도 있는데 주변에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슬플 것 같다.


담소 : 다른 사람들은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슬픔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어요. 제가 느끼는 슬픔 포인트가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더 궁금해졌어요. ‘내가 느끼는 슬픔은 나의 어디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일까?’ 이 질문을 붙들고 고민하고 분석도 해 봤어요. 하나하나 양파껍질을 벗겨 내듯 무의식을 한 꺼풀씩 벗겨 나갔어요.




상징적 슬픔

나무가 슬픈 이유 : 나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 나무가 절단될 때

나무가 느끼는 슬픔은 나의 무의식이 투영되어 나타난 상징적 슬픔이잖아요. 상징으로 나타나는 슬픔 말고, 진짜 나의 슬픔의 근원을 찾고 싶었어요. 저는 ‘나 자신’을 알고 싶어서 상징적 슬픔부터 분석해 봤죠. 나의 의지는 무엇일까?


현재 나무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을 만큼 행복하고 만족스러워요. 나무는 지금 이대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생을 살아가고, 마감하기를 원해요. 이것이 나무의 의지이고, 나의 의지는 곧 내가 원하는 것을 의미해요. 타인에 의해 나무가 절단되는 것은 외부 힘에 의해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의미해요.


슬픔이란 무엇일까요?

슬픈 원인이 무엇인지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정작 저는 슬픔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저 슬픈 상황에서 감정이 복받쳐 오르면 눈물이 핑 돌았죠. 슬픔이 무엇인지 인식하기도 전에 슬프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슬픔이 무엇인지 분석해 봤어요. 내가 느끼는 슬픔이란 무엇일까?


슬픈 감정 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어요. 허탈감, 무력감, 좌절감과 절망감, 억울함, 서러움 등이요. 내가 원하는 것이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는 허탈감.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좌절감과 절망감. 내가 어찌할 수 없으니 일어난 현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억울함. 억울함을 어디에도 분출할 수 없다는 서러움. 마지막에 느끼는 서러움에 복받쳐 올라 눈물이 펑 터져 나와요.


현실에서 느끼는 슬픔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길래… 나는 이리도 큰 무력감을 느끼는 것일까? 상징적 슬픔이 아니라 현실에서 느끼는 실제 숨겨진 슬픔은 어떤 것일까?

아주아주 어렸을 적부터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슬픔을 발견했어요. 그 슬픔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것이 슬픔인 것도 알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외면하고 무시했어요.


감추고 싶었던 숨겨진 이야기

슬픔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감당하기 버거운 거대한 슬픔이 아이를 덮쳤다.

3살 된 아이에게 닥친 ‘부모의 죽음’

 

아이에게만 닥친 일이 아니다.

아이의 언니. 오빠, 온 가족에게 동시에 일어났다.

피해자는 혼자가 아니라, 모두가 죽음의 피해자.

가해자 없는. 모두가 피해자.

누구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는 일!

‘죽음’은 많은 것을 당연하게 했다.

아이는 엄마. 아빠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여 ‘부모의 사랑’을 바라지 않는 것도 당연했으리라.

 

아무리 사랑해 달라고

바라고, 원하고, 애원한다고 해도

어디로 가… 닿을 곳 없는 마음이다.

되돌려 받지 못할 마음이다.

아무리 원해도 얻을 수 없는 마음이다.

 

안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못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매달리는 이는 얼마나 불쌍한가.

붙잡고 늘어지는 이는 얼마나 추한가.

 

차라리 아이는

처음부터 원하지 않기로 했어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

아무런 상처도 받을 일이 없으니까.

 

아이는 자라면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 익숙해졌다.

부모의 사랑뿐 아니라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것이 익숙하다.

 

아이에게 사랑이란,

감당하기 버거운 슬픈 괴로움이었다.

아이는 사랑이 두려웠다.

아니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남을 고통스러운 슬픔이 두려웠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느끼게 될 고통스러운 슬픔이 두려웠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

아무런 상처도 받을 일이 없다.




슬픔의 근원

슬픔의 근원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이에요. 아이가 원하는 것은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고요. 하지만 3살 때 돌아가신 부모님은 아이에게 사랑을 주실 수는 없잖아요. 간절히 원하는데 얻을 수 없어요. 간절히 원하는데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해요. 감정과 욕망을 다스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죠. 어렸을 땐 이런 복잡하고 무거운 감정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거 같아요. 이런 버겁고 복잡한 감정들이 모여서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겠죠. 부모님의 사랑은 절대 원해서는 안 되는 것 즉 ‘금지된 욕망’이 된 거죠. 그래서 부모님의 사랑도 원하지 않기로 한 거죠.

그런다고 부모님을 향한 마음이 억눌러졌을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본능적인 마음이라 아예 원하는 마음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해 버렸죠.


담소 : 제가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을 이제는 해보기로 했어요. 저… ‘부모님의 사랑’을 원해 보기로 했어요. 

중요한 건 내가 부모님의 사랑을 원한다는 사실이고, 지금까지의 문제 발생 원인은 원하는 것을 억압했기 때문이었어요. 억압으로 인해 나타나는 반사작용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은 끝이 없더라고요. 계속 반복될 뿐이죠. 반사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억압되고 있는 근본에 집중해야 해요. 억압되고 있는 본질은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원한다’는 사실이에요. 더 이상 억압하지 않기로 했어요.


오늘 아침, 이 사실을 깨닫고 한참 동안 눈물이 흘렀어요. 지금까지 억압받았을 나의 어린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타까워하고 보듬어 주는 치료의 눈물이기도 했고요. 이제는 더 이상 억압받지 않고 구속에서 해방되는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끼는 행복의 눈물이기도 했어요.


부모님의 사랑을 원해보자.’ 이 다짐이 뭐라고…


제가 상담을 신청했을 때 상담받고 싶은 것이 ‘언니와 연결된 감정을 해결하고 싶다’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언니만이 아니라, 가족! 즉 부모님과 연결된 복잡한 감정도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부모님과 연결된 감정은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하는지도 몰랐거든요. 그런데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문제의 실마리가 오늘 아침 해결된 거예요.


오늘 아침 깨달은 것이라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에요. 부모님의 사랑을 원해보기로 한다고 해서 앞으로 무엇이 달라질지는 알 수 없어요. 그래도 원해보기로 했어요. 부모님의 사랑!! 그저 ‘부모님의 사랑을 원해보자’라고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도 그동안 답답했던 심정이 많이 후련해졌어요.




상담사 : 이전에도 ‘부모님의 사랑을 원하는 나’는 있었을 텐데요. 매우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 힘든 순간들을 어떻게 견뎌 내셨을까요?

담소 : ‘부모님’이라는 단어조차 마음 놓고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어요. 말로 뱉어 내면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눈시울부터 붉어졌죠. 왈칵 눈물이 쏟아져 버릴까 봐. 감당 못 할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버겁고 힘드니까 아예 덮어 놓고 외면하면서 살지 않았을까요?

상담사 : 그럼.... 이제까지 마주하고 싶지 않았고, 외면하던 것을 지금은 어떻게 마주하고 있으신가요?

담소 :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잖아요. 저 혼자 하면 계속 회피하고 도망치니까. 선생님을 찾아왔고, 지금은 선생님이 도와주시고 있잖아요. 제가 더 이상 덮어 놓고 외면하면서 살지 않도록. 이제는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요.

상담사 : 지금의 담소님처럼 혼자 견디는 것이 힘들 때 누군가를 찾게 되는 것 같아요. 담소님이 힘들 때 스님 말씀을 가까이하거나 이렇게 상담센터를 찾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담소 : 네 맞아요. 혼자 끙끙대기보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 같아요.

상담사 : 오늘은 상담은 여기서 마쳐야 할 것 같아요. 다음 주에 심리검사 분석 결과에 대해 대화를 나누도록 해요.




                           구하라! 그러얻을 것이요.

                           찾으라! 그러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마태복음 7장 7절-


나는 아직 모른다. 내가 구하기 시작하면, 내가 찾기 시작하면, 내가 두드리기 시작하면 무엇을 찾게 될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나는 구해보기로 했다. 부모님의 사랑! 찾아보기로 했다. ‘부모님의 사랑! 두드려 보기로 했다. 부모님의 사랑!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 ‘나무의 슬픔’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노력을 통해 ‘슬픔의 근원’을 찾은 것처럼. 무엇이 되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러한 믿음에 의지해서 구해보고, 찾아보고, 두드려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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