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시에 함축된 의미를 찾아보려 했지만 공감능력이 부족해서인지 상상력이 부족해서인지 정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 정답(!)이었다. 시험에 나오는 문제를 하나라도 더 맞추기 위해 정답을 찾던 나는 시인의 의도도, 선생님의 설명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데 한문제라도 더 맞기 위해 억지로 외워야 한다는게 너무 힘들었다. 억지로 정답을 찾아야 하는 시와 소설은 나에게 감흥을 주지 못했고 어느새 나는 국어는 나와 맞지 않는 과목이라는 생각을 하며 모든 학창시절을 보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무협소설이나 판타지소설만 주구장창 읽어대던 나는 40살이 넘어서야 소설에 재미를 붙였다.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루이스 세풀베다 저)>, 이탈로 칼비노의 '선조 3부작'(<반쪼가리 자작>, <나무위의 남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특히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다. 물론 황석영, 김진명, 박민규 같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도 많이 읽고 좋아하게 되었다.
완벽주의 성격때문에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알쓸신잡' 프로그램에서 김영하 작가가 말한 "문학은 자기 답을 찾기 위해 보는 것일 뿐 작가가 숨겨놓은 주제를 찾는 보물찾기가 아니다"라는 말에 용기가 났다. 시험을 위해 억지로 외우던 감정이 아니라 내가 느낀, 나만의 해석을 찾아가면서 소설이 더 재미있어졌다.
그런 내가, 50살이 넘은 지금, 시를 읽기 시작했다. 정말 기회는 우연히 왔다. 박웅현 작가의 <책은 도끼다>를 다시 읽게 되었고, 그의 북토크에 참여하면서 고은 시인의 <순간의 꽃>을 손에 들었다.
이과 감성의 문과생이 과연 얼마나 시를 이해하고 감동할지 나 자신조차도 알 수가 없다. 그저 내가 몰랐던 세상을 알아본다는데 흥미가 생겼다. 또한 시를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용기를 내어 글을 쓰게 되었다. 이렇게 건조하게 시를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