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에 떨며 갈 곳이 카페뿐이었던 시애틀 여행.
모르는 장소를 아는 척할 때 ‘앞 큰 길에 스타벅스 있고, 거기 맞지?’라고 하면 절반은 성공일 거란 대화를 한 적 있다. 매장에 들리지 않더라도 하루의 이동 동선 중 꼭 지나치게 되는 스타벅스. 국내 매장만 2천 개가 넘었다는 기사를 봤다. 이전보다 다방면의 희소성은 사라지고 있지만, 해외에서 만나면 여긴 어떤 독특한 게 있을까 살펴보게 되는 내적 친밀감 가득한 브랜드. 기프티콘이 쌓일 때면 매장 커피보단 원두를 사게 되는데, 종종 사던 게 ‘파이크 플레이스 로스트’다. 시애틀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앞에 있는 스타벅스가 전세계의 1호점이었다.
라스베가스에서의 출장이 끝나고 몇일간 휴가를 붙여 시애틀에 다녀왔다. 프로젝트가 한참 진행 중이던 무렵, 다 마무리하고 갈만한 곳 없을까를 고민하며 바쁜 시간을 버텨냈다. 팀 선배가 적당히 유럽같고 내 정서에 잘 맞을 것 같다며 시애틀을 추천해 주셔 고민하던 찰나였다. 고민을 듣던 친구는 ’라스베가스에 있다가 휴가까지 붙여서 굳이 왜 시애틀을 가? 그 노잼도시에‘라며 냉소적이었는데, 그 말을 듣자 마자 비행기표를 끊었다. 커피가 맛있고 비가 자주오고. 노잼도시라니까 한국인이 많지도 않을 것 같은 데다, 군데군데 유럽 분위기까지 느껴진다니 짧은 여행으로 내가 충분히 즐기고 쉴 법 하다고 판단했다.
1월의 시애틀은 내가 살면서 겪은 추위 중 손에 꼽을 만큼 얼음장이었다. 겨울에도 비교적 따뜻한 미국 서부에 있다 갔으니 더 그랬을 법도 하지만, 도착한 날 기온은 영하13도, 어플에 뜬 체감온도는 영하 18도였다. 게다가 미국엔 마트를 아무리 찾아도 핫팩을 팔지 않는다. 수족냉증이 심해 늦가을부터 핫팩을 쓰는 나인데, 시애틀의 찬바람은 밖에서 구글맵 검색할 손의 힘조차 남겨주지 않았다. 미리 예약한 에어비앤비는 적당히 널찍했고 침대와 공용 소파가 넓어서 마음에 들었지만, 한국같이 온수가 콸콸 나오지 않는 답답함에 샤워할 때조차 온전히 몸을 녹이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춥지만 밖은 다녀봐야겠고, 뚜벅이 여행을 즐길 날씨는 아니다. 누군가는 노잼도시라 하는 시애틀을 선택한 이유인 만큼 머릿속을 비우고 다시 채워 넣는 여행을 택했다. 책과 맥북 커피. 도서관과 카페를 선택한 거다. 도서관이나 서점은 하루에 한 번씩. 시애틀 공립 도서관, 워싱턴 대학교 도서관. 카페는 하루에 두세 번씩. 커피가 맛있는 곳을 찾아 한 번, 책 읽고 일하기 좋은 카페로 한 번, 괜시리 들려봐야 하는 곳곳의 스타벅스로 한 번 더. 카페인에 민감하긴커녕 맛으로도 효능으로도 기분으로도 커피가 없으면 못 사는 나였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운 루틴이었다.
그렇게 방문한 스타벅스1호점과 로스터스 리저브, 비바체 에스프레소, 빅트롤라, 스토리빌레, 이름은 가물하지만 라떼가 맛있던 커피하우스들. 스타벅스 1호점은 그 히스토리만 유지한 채 굿즈 정도를 판매할 곳이려나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메뉴가 활성화되고 있었고, 앉을 좌석은 없지만 신메뉴 시음도 있었다. 무엇보다 항구 앞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 위치해 다녀본 어느 스타벅스와도 다른 무드였다. 초기 사이렌 로고가 참 잘어울렸다. 맛있는 에스프레소로 기억되는건 정작 다른 카페이긴 하지만, 시애틀 여행을 떠올리면 1976년의 스타벅스 인어가 먼저 아른거리는 게 사실이다. 훗날 한국이란 곳에 도로마다 하나씩 위치한 카페가 될 줄 알았을까. 반가웠다. 고즈넉한 항구 앞에서 커피향 맡으며 오래 앉아있고 싶어라.
(가장 위 세 장의 사진은 시애틀 스타벅스 로스터스 리저브. 1호점은 글 아래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