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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지 Nov 04. 2023

신은 존재한적 없는 기쁨

차곡차곡 질문에 대한 답을 마련한다. '나를 왜 낳으셨을까?' 종교와 신, 사후세계처럼 저 멀리 치워버린 물음이었다. 먹고 사는 부분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지는 시기 중년, 나는 '엄마 아빠가 행복하기 위해 네가 필요했어'라는 핑계를 준비중이었다. 아들이 말했다.

 

"다윤이가 여동생 필요하대."


이미 정관을 묶어서 더이상은 무리였다.


"아빤 다온이 다윤이만으로도 충분해."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 거야?"


"아빠 고추가 엄마 뱃속에 들어가면 아기가 생겨."


"그럼 고추가 없어지잖아."


다행히 고추는 잘리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하고 방문했던 아기집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경험은 자녀의 잉태와 양육 과정이다. 물론 신이 되는 과정 도중에는 신들린 퍼포먼스도 필요하다. 마치 공장 노동자처럼 동일한 패턴의 움직임을 반복 운동하고나면 비로소 신났던 기분도 사라진다. 신은 존재한적 없는 기쁨이려나? 신이 되려는 자들에게 그 과정을 신중히 결정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자녀라는 행복을 키우기 위해서는 포기해야하는 댓가가 크기때문이다.






나는 그무렵 자녀의 장애가 걱정됐다. 몇몇 가정의 통제하기 힘든 자녀들을 보아왔던 터였다. 자녀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헌신하는 부모들은 무기징역의 형벌에 맞서는 시한부 인생처럼 보였다. 그들처럼 인내의 삶을 살 자신이 없었다. 아픈 자녀의 키가 닿지 않는 곳에 시건장치를 달은 집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아닌 내부에서 외부로의 침입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중 시건 장치가 고단함을 대변한다. 냉장고에는 아내의 젊은 시절 사진이 붙어있다. 분명 지금의 이 고단한 삶을 향한 미소는 아니었을텐데 마치 타인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아픈 자식을 키우면서 많이 힘드셨겠구나.'


자녀의 돌발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소리치는 아빠, 몸과 마음이 성치 않은 아이가 부모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삶을 실행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단순 노동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독립의 양분을 마련할 수 있을텐데 이마저도 쉽지 않다. 기회의 여부는 상태에 따라 다르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아픈 자녀를 봉양하는 삶은 상승 지향의 삶보다 생존 지향의 삶에 가까운 모습이다. 부모의 삶은 초침처럼 분주하지만 자녀의 삶은 시침처럼 느리게 이동한다. 초침이 멈추면 더이상 자녀의 시간도 흐르지 않을 것만 같다.



'내 아이는 사회에서 무탈하게 생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아직 부재 중이다. 중년이 되어서도 먹고 사는 문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경험했다. 아마 몇몇 상승혼의 기회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궁색하게 살지는 않았을성 싶다. 삐끗하면 골로가는 한국 사회에서 내 아이에게 위태로운 삶을 물려줄까봐 그저 죄스럽다. 부모는 여전히 아이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을 주는 존재여야 한다. 그것을 조언으로 또는 지원으로 해결할 수도 있고, 부모의 삶을 통해 가르치기도 한다. 아빠를 따라 학습하는 아이들이 대견하다. 청소를 일종의 놀이로 여기고 도와주는 아이들이 사랑스럽다.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자라주었으면 하는 마음, 아이들이 고3이 되어서도 변치 않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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