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식함에 대하여
99년 봄, 나는 신병교육대에 있었다.
같은 훈련병 기수에 역술로 유명한 녀석이 있었다. 소대장이며 조교들이며 훈련병 동기들 까지 이 녀석만 보면 자기 손을 내보이며 손금과 관상을 봐달라고 했다.
나에게는 통 물어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나도 손금 봐줘' 열풍이 사그라든 어느 날, 화장실 세면대에 우연히 그 녀석과 둘만 남은 기회가 생겼다.
나는 재빨리 손을 쓱 내밀었다.
그 녀석은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한마디 툭 던지고 달려 나갔다.
"가방끈이 짧네."
'어이씨, 내가 왜 가방 끈이 짧다는 거야. 이 녀석 아무것도 모르네. 나 학교 다닐 때 시 전체에서 랭킹 안에 들었단 말이야.'
그때만 해도 엘리트 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던 터라 그 녀석의 말은 터무니없는 소리라 느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의 말이 자꾸 생각나 곱씹게 된다.
나는 가방끈이 짧은 게 맞다.
단순히 이력서에나 기재되는 학력이 아니라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절감하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갈수록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글 앞에서 벽을 느낀달까? 그런데 그 벽을 넘지 않고 가만히 서있거나 도망간다. 그렇게 도망가버릇하던 그때 그 수준에서 나는 멈춰버린 것 같다.
모르는 것을 모른척하는 나쁜 습관이 배어버렸다. 실례로 금융 관련 글을 읽을 때면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라'가 된다. 문해력도 후퇴했고, 텍스트에 집중하는 시간도 짧다.
책을 읽을 때마다, 블로그 글을 읽을 때마다, 조승연 님 같은 사람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의 가방끈은 참으로 짧디 짧다는 걸 느낀다. 나의 무지함을 인정한다.
결국 내가 편하고자 하는 수준에서 갇힌다.
모르면 묻기 창피하고, 찾아보기 귀찮고, 그렇게 계속 모른 척해버린다. 여기에 성질머리마저 고약해지고, 무식의 벽에 막히면, 할 수 있는 게 비난이나 조롱밖에 없는 하류인생으로 가는 걸 게다.
가끔 책을 읽다 무릎을 칠 때가 있다.
오랫동안 엉켜있던 마음이 풀리기도 하고, 짙은 안개가 걷히는 기분도 든다. 실실 웃음도 새어 나오고 발걸음이 가벼워지기도 하고 그런다. 그러다 나의 무지함에 부끄러워질 때 머리를 한대 치기도 한다.
누가 그랬다.
독서는 캄캄한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이라고.
등불도 없이 짙은 어둠 속을 걷기 때문에 사는 게 힘든 건 아니었을까? 실로 그런 것이 이 책을 더 일찍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엊그제 세차를 맡기고 근처 스타벅스에 들렀다.
픽업대 근처에 자기 커피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에도 서서 책을 읽고 있는 60대 남자분을 봤다.
너무 멋져 보여서 사진을 찍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는 그분의 모습이 계속 아른거릴 것 같다. 저런 모습의 나로 나이 들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말했다.
"이십 대는 의리가 지배하고,
삼십 대는 재치가 지배하고,
사십 대는 판단이 지배한다"고
사십 대 이후부터 평생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은
아마도 책일 것이다.
-손웅정,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