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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다비 Dec 18. 2021

1.1] 물리치료사를 그만두고 캐나다에 간 이유

2015년 9월, 퇴직금을 받을 수 있게 되자마자 바로 일을 그만두었다. 길고도 짧았던 1년의 시간 동안 나는 정형외과에서 일하는 물리치료사였다. 남들이 볼 때 안정적이고 전문직으로 인정받는 좋은 직업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에게 1년 동안 병원에서 일하면서 겪었던 일들은 나를 한국의 사회 제도로부터 벗어나 도망가고 싶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1년 동안에 있었던 긴 이야기에 대해서 최대한 짧게 얘기해보겠다. 나는 5명이 함께 일하는 물리치료실에서 일했다. 내가 입사할 당시에, 50대의 실장님이 계셨고 그 밑으로 40대, 30대 선생님 한분씩 있고 그리고 3년 차 경력의 20대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나는 갓 졸업하고 취직하게 된 병원의 막내이자 신입이었다. 내가 들어가고 일주일이 지나자 40대 선생님이 시어머니께서 더 이상 애를 봐줄 수 없게 되어 일을 그만두셨다. 그 선생님을 대신할 자리에 나와 같이 면접을 보았었던 나이와 연차가 많으신 40대 선생님을 을 모시게 되었다. 


병원은 경영 사정이 안 좋아지자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병원에서 의원으로 바꾸었고, 환자에게 청구하는 의료비를 낮추고 더 많은 환자를 모았다. 그리고 병원 운영 시간도 연장하여 6시에서 6시 30분으로 바꿨다. 이러한 변화로  물리치료실에 환자가 많아지자 50대의 실장님은 체력적으로 힘들어하셨고 결국, 다른 요양 병원으로 이직을 하셨다. 실장님이 나가신 자리에 30대의 경력 10년 차  새로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실장님이 나가시고 새로운 실장을 뽑아야 했다. 우리는 병원에서 가장 오래 일해서 병원을 제일 잘 알고 있는  기존의 30대 선생님이 실장이 되길 바랬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40대 선생님을 아래 직원으로 두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실장 자리를 거절하셨다. 그래서 결국, 나이가 제일 많으신 40대 새로 들어오신 선생님이 병원에 입사하고 한 달 만에 실장님이 되셨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물리치료실 실장이라는 직책은 병원 원무과와  물리치료사 사이에서 의견을 잘 조율해줘야 하는 자리이다. 하지만 입사한 지 한 달 밖에 안된 새 실장님은  마음이 조급했다. 자기가 실장으로서 적합한 사람인 것을 입증하기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정받기 위해서 병원의 편이 되었다. 물리치료사들의 의견은 묻지도 않은 채 병원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주었다. 


병원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고주파라는 새로운 장비를 물리치료실에 도입했다. 고주파 장비는 치료하는 시간이 5분 이상 걸려 고주파 치료를 들어가면 다른 선생님들이 고주파 치료 들어간 선생님의 다른 일을 대신해줘야 했다. 이렇게 치료실에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사람이 자주 바뀌자 3년 차로 계시던 선생님은 몸이 안 좋아지셔서 병원을 결국 그만두셨다. 내가 입사한 이후로 세번 째로 또 새로운 치료사를 구했다. 20대의 3년 차 되는 새로운 선생님이 들어왔다. 입사하고 3개월 동안 거의 한달에 한명씩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


그런 와중에  기존에 있던 실장님 대신 들어온 30대 선생님은 입사하고 2달 만에 임신을 하게 되셨다. 그리고  연이어 한 달 뒤에 병원에서 가장 오래 일했던, 실장자리를 거절하셨던 선생님도 임신하셨다. 치료실에 선생님 두 분이 임신을 하게되자 실장은 원무과와  임신한 선생님들 사이에서 출산과 육아 휴직에 관해서 중재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실장은 어떻게든 지출을 줄이려고 출산과 육아 휴직을 덜 주려고 하는 하는 병원이 편이 되었다. 당연히 임신한 선생님들과 실장님의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하고 치료실 내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물리치료실에서는 편 가르기 아닌 편 가르기 같은 일이 생겼다. 예를 들면, 내가 임신한 선생님과 같은 라인에서 일을 할 때 선생님이 몸이 무겁고 힘드시니까, 내가 임산부 선생님들 일도 같이 도와드렸다. 그런데 이를 본 실장은 임산부 선생님들이 제대로 일을 안 한다고 간주하며 나한테 도와주지 말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고 유치한 일이다.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일이 끝나고 집에 와서 쉬고 있는데 실장의 전화가 걸려오는 것이었다. 퇴근 후, 실장은 나한테 전화해 자기 하소연을 늘어 놓으면서 내가 자기 편이 되주길 바랬다. 그 이야기는 나는 일주일 2-3번, 2시간 넘게 통화를 했었다. 


나는 그렇게 1년을 버텼다. 1년 동안 일하면서 같이 일하는 치료사들이 5명 넘게 바뀌었다. 출산과 육아휴직을 관련 해서 이해관계를 따지며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온 종일 서서 왔다갔다 하며 일하다 보니 저녁엔 다리가 퉁퉁 부었다. 집에 누우면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고, 배고프지만 힘이 없어 저녁도 먹기 싫을 때가 있었다. 그렇게 지쳐 쓰러져가는 내 모습에 스스로가 안스러워 눈물이 흘러나왔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시절,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도 다들 하는 이야기가 똑같았다. 우리 회사에 누가 이렇다. 우리 병원에 누가 이렇다. 죄다 직장에 대한 불만과 직장 내에서 일어나는 안 좋은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어딜 가나 다 똑같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망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더 이상 남아있다가 나도 모르게 한국 사회에 안 좋은 관습에 물들 것 같았다. 그러기 싫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내게 맞는 절을 선택해서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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