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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Jun 13. 2022

지금 당신은 행복한가요?

| 살기 위해 적는 문장들


“우리는 모두 이 땅에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일을 꼽으라면 드라마 보기라고 말하겠다. 조용히 코를 고는 따뜻한 강아지를 옆에 두고, 폭신한 침대에 누워, 발치에 있는 티비로 드라마를 본다. 인물의 외모에 감탄도 하고, 이어지는 스토리에 감동도 받고, 대사 한 줄에 머리가 멍해지기도 한다.


구필수는 없다라는 드라마에서 중학생 아들이 묻는다. “아빠는 행복해? 그게  행복이 맞아? 엄마 행복이 아니고?” 나는  말에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다.  지금 행복하니?





저녁식사를 준비하며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친구의 자식들 이야기를 하며 그래도 너는 잘 자라서 다행이야, 하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심사가 뒤틀렸다. 내가 잘 자랐어? 우울증에 알코올 의존증을 안고 일 년을 넘게 사는데? 내가 뭘 해야 행복한지, 어떻게 알아가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는데? 나는 튀어나오는 말을 삼켰다. 나에게 일었던 분노를 엄마에게 옮기는 것이었으니까. 대신 난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다. 엄마는 왜? 하고 물었다. 나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잠시 고민하더니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 말했다. 나는 말만이라도 좋다고 웃었다.


어제 종영한 ‘우리들의 블루스’ 마지막 장면엔 자막이 하나 뜬다. 우리는 이 땅에 불행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나는 그 말을 메모장에 옮겨 적었다. 내가 불행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왜 자꾸만 행복이라는 단어가 주변을 맴도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했다.


강아지가 내 품에 파고들 때, 딱 맞춰 들어오는 지하철을 바로 탔을 때, 아주 속을 썩이던 일을 성공리에 마쳤을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마음을 열 때,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하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눌 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어느 밤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올 때, 오랜 친구들과 예전 추억을 이야기하며 킬킬대고 웃을 때, 빨래한 이불을 처음 덮을 때, 나의 글에 내 마음이 그대로 내비쳐질 때 사실 나는 행복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행복을 때때로 마주하며 웃어 보였다. 때론 마음이 부풀어 이대로 터져버릴 것 같았다. 행복은 멀리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행복과 슬픔은 세트처럼 묶여 다녔다. 나는 꼭 행복한만큼 슬펐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고통 없는 삶을 바랄 것이 아니라 고통이 있어도 나의 운명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평온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그 평온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일까. 내가 단순하게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인 걸까. 고통을 버티기엔 무른 마음을 가졌기 때문인 걸까. 나는 아직 나의 운명과 고통을 사랑하지 못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는 내가 나아졌다고 믿었다. 이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그래서 그 과정과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이유로 브런치 작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전의 나보다 더 망가졌음을 느낀다. 그저 뒤덮인 슬픔에 의연해졌을 뿐. 다독이고 모르는 척하는 방법을 터득했을 뿐. 마주하고 인정하고 결국엔 사랑하여 우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런치의 작가의 자격이 상실되었다고 느꼈다. 틀과 체계에 대한 강박이 있어서일까, 일기 같은 글이나 올리라고 나에게 작가의 자격을 준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주저했다. 나는 작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니까. 적어나갈 줄만 알 뿐 문장을 올바르게 구사하는 방법도 모르니까. 내가 적고자 했던 방향과 다른 글이라면 이곳에 적힐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그런데 말하고 싶다. 너무 힘들다고, 슬프다고,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누군가는 읽어줄 테니까. 어쩌면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이제는 방향을 조금 바꿔보려 한다. 우울에서 벗어난 내가 건넬 수 있는 위로의 글이 아니라, 땅을 파고 들어가는 슬픔을 느끼는 자의 살고자 하는 발버둥의 글로. 나는 살기 위해 적는다. 나의 기분, 상황, 그리고 긁어모으는 작은 행복들을. 그래서 결국에는 평온을 찾는 결말을 이루고 싶다.


우리는  땅에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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