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코르뷔지에 설계 도쿄 국립서양미술관, 아기랑 가기 좋은 이유
돌아기와 돌아다닐 때, 미술관은 참 좋은 선택지라고 이미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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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또 한 번 써볼까 한다.
도쿄 여행의 막바지 전시는 국립서양미술관에서 봤다. 국립서양미술관은 특이하게도 우에노공원역에 있었다. 이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미술관이 여는 10시에 딱 맞춰 도착했지만 이미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5월 초였기 때문에 더워지기 직전이었고 어린아이들과 나들이를 나온 부모들로 가득 찼다. 우에노공원역에는 정말 맛있어 보이는 도시락들을 파는 가게들이 역 안에 줄지어있어서, 그것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와 남편도 아기랑 먹기 좋은 도시락을 몇 개 고르고 공원에 앉아 도시락을 까먹은 뒤 미술관 관람을 시작했다. 지금처럼 더운 날에는 다시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날 바람이 많이 불어서 아기가 감기에 걸릴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도시락을 후다닥 먹은 것이 기억난다.
국립서양미술관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기증 반환된 ‘마츠카타 컬렉션’을 보존, 공개하기 위해 1959년 설립되었다. 마츠카타 코지로는 일본의 주식회사 가와사키조선소의 초대 사장이다. 그는 1910~1920년 대 유럽에서 막대한 미술품을 수집했는데, 일본의 젊은 이들에게 서양 미술품을 보여주고 싶어서 취미를 넘어 수집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공황을 겪으면서 그의 꿈인 미술관 설립이 실패하고, 수집품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그 가운데 남은 400개 정도의 수집품은 제2차 대전 말기에 프랑스 정부 관리 하에 놓이게 된다. 이후 프랑스가 이 '마츠카타 컬렉션'을 일본에 기증 반환하기로 결정하면서 국립서양미술관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출처: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홈페이지)
이곳은 들어서기 전부터 로댕의 유명한 조각품들이
줄지어져 있어 밖에서만 봐도 꽤 사진 찍을 것이 많은 공간이다.
게다가 건축 설계부터가 르 코르뷔지에다. 그렇기에 미술관 건물을 구경하는 것 자체가 경험이 될 수 있는 곳이다.
르 코르뷔지에가 이 건축물을 지은 아이디어의 근간은 ‘무한 성장 미술관’이라고 한다. 소용돌이 형태의 평면 구성으로 점점 소장품이 늘어나도 전시실 바깥으로 증축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라고 한다.
실제로 고둥 느낌으로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미술작품을 볼 수 있다.
무한 증축이라는 아이디어도 놀랍지만 이 같은 설계는 유모차를 끌거나 휠체어를 탄 사람과도 함께 하기 좋은 건축물 구조였다.
유모차나 휠체어를 끌면 직선으로 계단으로 가는 것보다 돌아가야 하기에 매우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미술관은 모두가 천천히 걷는 곳이다. 작품 감상을 할 때 천천히 걷는 것은 당연하고 미술관 특유의 여유 있고 우아한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퍼져있다. 효율적인, 아주 빠른 걸음과는 관계없는 장소라고나 할까. 그렇기에 오히려 느리게 이동하는 구조가 오히려 작품 감상하기에도 ‘효율적’인 공간이다. (그렇다고 모든 공간에 계단이 없는 건 아니다.)
꼭 이런 구조가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미술관의 바닥은 매끄러울 수밖에 없다. 미술 감상을 하면서 걷는데 바닥이 매끈하지 않으면 다치기 쉽다. 모두가 한눈(?)을 팔면서 걷는 곳이기에 계단이나 턱이 있으면 안 되니까. 이렇게 베리어 프리한 공간인 동시에 그것이 효율적일 수 있는 곳이 미술관 외에 또 있을까 싶었다.
보통 베리어 프리한 공간이 만들어져 있는 곳들을 가도, 이동에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계단 등이 바로 옆에 있다. 그래서 바로 옆에 있는 계단을 보면서 나선형의 길로 돌아가다 보면 억울한 마음이 든다. ‘아 내가 유모차가 없으면 저기로 빨리 갈 텐데’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휠체어 이용자도 마찬가지일 거다.
물론 나선형 길이 없는 공간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들어야 하겠지만, 이런 억울한 생각을 주는 구조는 사실 좋은 베리어프리한 공간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이동에 편한 사람이 아님을 상기시키고, 어쩔 수 없이 피해의식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비효율적으로 걷자!'면서 모든 공간을 나선형으로 만들자고 하기에도 무언가 찝찝하다. 공간 활용이 비효율적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인간이다.) 그러나 미술관에서만큼은 모두가 천천히 걷기에, 빨리 걸으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제대로 작품 감상을 못하니까) 특수한 환경이다. 그렇기에 나선형의 구조가 꼭 베리어 프리를 의도한 것이 아니더라도 미술 관람에 굉장히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꼭 이 미술관만이 아니더라도,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것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미술관은 동선이 편하고 매끈하긴 하다. 그렇기에 아기와 함께 다니기 좋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반복해서 쓰고 있다.
베리어 프리하다는 이유만으로 나선형의 건물 구조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보통 미술관을 가면 1관, 2관, 3관 등을 갈 때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미술관 곳곳에 화살표, '전시 관람 방향' 따위를 보면서 꽤 부자연스럽게 걸어 다녀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미술관은 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면서 전시를 볼 수 있는 동선으로 짜인 느낌이 들어서 무한 성장한다는 콘셉트가 아니어도 자연스러운 관람에 좋았던 기억이 난다.
무한 성장 미술관의 실현 사례는 이곳 외에도 인도에 있는 미술관 등 총 3군데가 있다고 한다. 물론 부지의 문제로 실제로 ‘무한 성장’ 하지는 못하지만 이 아이디어를 잘 활용한 공간이라고 평가받는다.
프랑스가 가져갔던 작품들을 전후 반환하면서 마츠카타 컬렉션 370점을 보관하기 위해 국립서양미술관이 개관했다. 현재는 회화, 조각, 소묘, 판화 등 6000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로댕의 유명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9년 증축된 신관은 특히 나무들이 멋진 정원과 어우러져 로댕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몇 년 전 프랑스에서 들렀던 로댕 박물관의 축소판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우연하게도 우리가 간 날은 무료관람일이었다. 가와사키 프리 선데이라고, 가와사키 중공업의 협찬으로 상설 전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었다. 무료관람일은 매월 두 번째 일요일뿐인데 정말 운이 좋았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공원에서는 여러 종류의 시위도 한창이었다. 남편과 나는 시위에 대해서도 몇 마디 나누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렇게 여행을 와서 미술품도 보고, 미술관 건축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시위하는 사람들도 구경하다 보면 '아기가 좀 더 커서 같이 이야기할 수 있으면 더 좋았을 걸'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나 아이가 조금 더 크면 또 미술관 같은 곳은 같이 올 수조차 없겠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나 역시 아빠가 가자고 했던 산에 가기 싫어했고 집에서 TV를 보고 싶어 했으니. 아이가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 자란다면 정말 즐겁게 관람을 자주 할 테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아직 취향이 없는 아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는 곳으로 가야만 하는 아기이기 때문에 여행에서 '1일 1 미술관'을 해줄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기와 미술관 위주로 여행하기는 정말 이때만 가능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기’와 미술관 가기 좋은 이유가 또 하나 추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