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국어학과를 목표로 해서 대학을 선택해서 입학을 했다. 내가 수능을 마치고 대학을 선별할 때 다양한 학과를 보며 내 능력이 어느 학과에 맞을지 고민했다. 심리학과, 경영학과는 ‘수학’이 꼈다. 난 수학을 끝내주게 싫어하고 못해서 수학을 보지 않는 곳을 찾았다. 그렇게 추려진게 인문대학이였다. 역사학과를 갈까해서 한국사학과를 찾아보니 한 곳이 눈에 띄였다. 그러나 이 학교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다. 거기에 경기도 수원에 위치하고 있어 경기도에 산 적이 없는 나로선 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수는 안전하게 수시로 합격할 수준인 데 살아가는 게 문제였다. 그 다음으로 본 게 한림대 중국학과였다. 이도 수시로 무난히 합격할 수 있는 점수컷 라인이였다.
나 혼자 결정을 할 수 없어 부모님과 상의했다. 그래서 경기도는 부모님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지 말라고 해서 외가가 있는 춘천 한림대 중국학과로 정했다. 이걸 3학년 담임에게 통보하듯이 알렸다. 별 무리 없이 내가 정해서 가니 아무 말이 없었다. 뒤에선 여전히 3년 전교 꼴찌가 대학에 무난히 간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난 말한다. 최종학력이 평생 간다고. 고교성적은 수능 보기 위한 준비지, 대학성적이 평생 간단다~ 대학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4년 전체평점을 높은 점수 만들면 되니까, 지금의 고교생들 기 죽지마!!
이렇게 해서 난 대학에 갔고 1학년에 입학하니 갑자기 학군제로 바꾸고 말았다. 중국하과, 일본학과, 러시아학과였는 데 합친 거다. 결국엔 다시 각 학과별로 나눴다. 4년을 학생들이 피해를 입었다. 00학번~ 03학번까지. 학생들과 교수들이 끈질기게 학교에 항의를 해서 학군제를 폐지하게 했다. 나는 피해를 본 학번이다.
난 고교 3년동안 열심히 공부했으니 대학 1학년은 놀면서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놀았다. 지금 생각해도 후회 없다. 내가 잘 몰랐던 부분을 알 게 된, 눈을 뜨게 된 1년이였으니까.
기숙사는 2개월 보름만에 나왔다. 도저히 단체생활을 못 하겠더라고. 한 참 부동산을 통해 소개를 받은 집 중 단독주택 한 곳에 전세로 방 한 칸을 빌렸다. 엄마는 자취를 하니까 그릇이나 가스레인지를 사 주는 데 우셨다.
“시집 보내는 게 이 느낌일까? 품 안의 자식이 나간다하니 먹먹하네.”
정말 시집 가면 어쩌려고 달랑 자취집 세간살이를 채우는 데 운 건지. 펑펑 운건 아니고 눈물, 콧물을 약간 흘린 거지만 부모 입장에서 그런가보다. 아마도 외할머니도 시집과 장가로 독립하는 자녀들 보며 똑 같은 감정이 셨겠다는 생각이 미쳤다.
그렇게 자취를 처음 하게 되었다. 내가 요리를 전~혀 못하고, 청소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서 고생한 시기였다. 그 시절엔 2g휴대폰이였다. 지금처럼 요리하는 과정이 나온 유튜브 영상도 없었다. 요리책을 사서 하나씩 해 나가야 했다. 하지만 또 내가 요리에 쓰이는 용어에 까막눈이여서 봐도 뭔 소린지 몰랐다. 그래서 식사는 주로 학생식당이나 음식점에서 해결을 해서 100만원의 식비가 한달에 들어가버렸다. 부모님은 군말 없이 용돈은 척척 주셨다. 내가 만들어 먹는 법을 모른다 생각하셔서 요청대로 주셨다.
각설하고 학과공부는 착착 잘 진행이 되었다. 첫 학기, 1학년 1학기는 교양과 전공을 적절히 섞었다. 지금 되돌아보며 교양과목을 주로 들었어야 할 시기였는 데 과 전공을 갓 신입생이 들었다. 하나는 사학과 4학년 과목이였다. 근데 이 사학과 중국역사를 가르치는 것이였다. 난 그래도 어렵지 않고 오히려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역사에 강한 모습을 보였다. 오죽하면 사학과 4학년 학생이 1학년 학생에게 의지할 지경이였다.
학과 수강신청을 하면서 참 이상한 중국학과 소속 남자선배가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이 중국학과 선배 때문에 사학과와 중국학과 전공 수업을 들었다. 어찌나 조르던지. 자신과 같이 듣는 것도 아닌데 키는 너무 작고 볼품없는 남대학생이였다. 정작 자신은 졸업을 못하고 관둔 것처럼 보였다. 이 때 이 남자선배 때문에 고생 아닌 고생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이고 순진하게 생겨서 잘 속아 넘어 갈 것처럼 보였나 보다. 내가 그렇게 보여도 똑똑하다는 말을 곧잘 들었는 데도 말이다. 공부 머리는 아니였는지 몰라도. (공부 머리였음 스카이를 가야 했겠지?)
그래도 1,2학년 공부는 열심히는 하지 않았다. 성적으로 과를 가른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쩝…. 평가할 게 학기평점밖에 없는 데 말이다. 그래서 열심히 1학년데 고 3년동안 쉬지 못한 거 쉬자는 취지로 했더니 러시아학과로 배정이 되었다. 놀라웠다. 내가 모르는 곳에 떨어지다니. 중국도 다 아는 거 아니지만 러시아는 너무 더 생소했다. 2학년 1학기는 방황하는 시기였다. 마음을 잡지 못했고 반수/재수하라는 말도 동기들에게 많이 들었다. 다시 수능을 보면 잘 보고 더 좋은? 대학으로 갈 거라면서. 실제 하는 이도 있는 데 나중에 4년평균점수을 못 받아서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되어있었다. 그래도 어떤 유혹에더 넘어가지 않은 나는 최종 4년전체평균점술를 잘 받았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줬다. 2학년 2학기부터 정신 차리고 공부에 매진한 결과다.
이 땐 무턱대고 놀았다기 보다 세상을 알아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내가 세상에서 우물안의 개구리 라는 걸 알고 더 큰 곳에서 놀아야 사람이 크게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1학년은 사회라는 걸 알아가는, 서울이라는 곳을 알아가는 시기였다. 정말 서울을 모르고 지하철, 시외버스, 기차를 탈 줄 몰랐는 데 이 때 배웠다. 스마트 폰이 없던 시절, 조그마한 지하철 노선표를 보며 잘못 타서 내렸다 다시 타고 하는 일도 반복하며 재미가 있었다. 몸은 고생했지만 말이다. 동기들에게 배웠다. 난 아는 게 하나도 없기에. 맛난 거(최고급이 아닌) 사주면서 말이다. 노는 법도 배우고, 컴퓨터 게임도 배워 나름대로 재미있게 보냈다. 학과 공부를 소홀히 한 대신 다른 걸 얻은 1학년과 2학년 1학기까지 공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