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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막 Aug 29. 2022

EP01 풍선은 열기구가 될 거야


 굳이. 내가 있어야 할까, 굳이? 밤이 되었고, 낮은 금방 오고, 또다시 눈을 뜨면 새벽이고, 눈을 감는 게 너무 무섭다. 애정으로 하루를 채우는 것에 지쳐버렸다. 온몸이 서서히 녹아내리듯이 침대에 퍼질러 누워 있다 보면, 앗, 또 낮이다. 의미도 가치도 없다. 일회성, 잠시일 뿐. 하루는 쉽게만 흘러간다. 의미가 없는 하루는 있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애인이 슬퍼한다. 왜 울까, 하고 생각할 때면 내가 너무 먼 곳으로 와버린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다 애인이랑 영영 멀어져 버리면 어쩌지. 괜찮을 거다. 전부 제자리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 네 옆이 내 자리가 아니었을 뿐이지. 하나를 잃으면 손에 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다. 모래를 쥐면 가는 모래가 손바닥에 붙어있는 것도 싫다. 전부 다 탈탈 털어버려야 마음이 놓이는 하루다.


 그런데 왜 난 널 놓지 못할까. 이제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애인밖에 없다. 이제 너만 없으면 될 것 같다. 내 옆에서 날 직시하는 눈을 볼 때면 괜스레 시선을 피하고만 싶어 진다. 애인은 항상 내 옆에 있어 준다. 굳이. 나는 그 어떤 상실도 느끼고 싶지 않은데. 이제는 즐거움마저 거북함이 드는데 너는 왜 자꾸 나보고 행복해지라고 할까. 평생을 외로워하며 살 수밖에 없다면 그냥 그렇게 살고 싶다. 무엇도 쥐고 싶지 않다. 무엇도 나를 떠나게 두고 싶지 않다. 나를 떠날 거면 그냥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노력조차 하고 싶지 않다. 하루를 보내는 것조차 하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게 이리도 많은데 내가 굳이 전부 참아야 하는 걸까. 그러니까 굳이. ‘해야 한다’와 ‘굳이’의 사이. 이 사이를 오가며 살았고, 이제 다른 방법은 모르겠다. 근데 내가 꼭 알아야 할까.


 나는 ‘-일 것이다’가 좋다. 예언적 느낌이 드는 게 뭔가 마음에 든다. 내 인생도 운명론적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 이렇게 불행해진 게 내 정해진 운명이었으면 차라리 낫겠다. 난 노력할 만큼 했잖아? 그럼 내가 죽어도 그게 운명인 거겠지? 그치. 그럼 내 탓은 아니잖아. 그게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러니 나는 죽게 될 것이다,라고 쓰자. 유서를 써보고 싶지만 쓰고 싶진 않다. 유서를 쓰다 보면 엄마 얘기가 안 나올 수 없으니까 말조차 꺼내고 싶지 않다. 엄마를 원망하고 싶지 않다. 엄마가 내 유서에 담기는 걸 원치 않는다. 그러니 나는 쓰지 않는다. 그럼 뭘 해야 하는 걸까. 누워만 있는 채 시간을 보내다 보면 팔의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한다. 팔을 드는 게 낯설어서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가 펴는 것을 반복한다. 오로지 그것만 한다. 그러면 애인은 또 운다. 우는 애인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뭔가 더듬더듬 말을 꺼내는데 별로 듣고 싶지 않다. 모두를 고시텔로 도망치고 싶다. 한 달을 내리 죽을 기회만 엿보다가 그냥 그렇게 죽어버리고 싶다. 꼭 살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


 알고 있다. 지금이 내가 겪은 시기 중에 제일 나을 때인 것을. 공부를 할 수 있고, 애인이 나를 도와주고, 당장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 쉬어도 된다고 애인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응, 제일 낫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지? 자꾸만 옛날 생각이 난다. 옛날에 지냈던 애들이 생각이 난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애 중에 죽는 애 없더라. 원래 진짜로 죽는 애들은 말없이 죽는다고. 아, 그때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일이 어떻게 되든 그때 죽어야 했다. 나는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왜 죽질 못해서. 지금 자꾸 그 생각이 나는 걸 보니 지금 죽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죽어야 했다. 그렇게 속으로 되뇌고 살다 보니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조차 희미해졌다. 일렁이는 감정 밑에 다른 감정이 잔잔하게 깔려있다. 죽고 싶다. 여태껏 스스로 죽고 싶어 하는지도 몰랐다. 이게 자살 사고의 한 흐름인지도 몰랐다. 맞네, 나 꽤 오랫동안 죽고 싶어 했구나. 너무 혼자 오래 되뇌다 보니까 그냥 무심코 지나가 버렸네. 자살 시도한 적이 없으니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도 못 했지.


 그렇지만 애인이 슬픈 건 싫은데. 그거만은 정말 싫었다. 안 그래도 나 때문에 원치 않은 고통을 잔뜩 끌어안고 사는 애인데 애인의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굳이 추가해주고 싶지 않다. 그럼 애인이 아니라 전 애인이면 되는 것 아닐까? 헤어지자. 헤어지면 다 해결될 거야. 너는 네 자리를 찾고, 나는 그냥 죽어버리고. 해피엔딩이 아닐까. 어차피 나는 더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애인이 내 손을 잡고 말한다. 살고 싶어서 죽고 싶은 거 아니냐고. 별로. 딱히 살고 싶지 않아.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살고 싶어 지겠지. 그러니 지금 당장 죽고 싶어. 다시는 살고 싶단 생각도 못 하도록. 내가 할 수는 말은 하나였다. 아니,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지 않아. 안타깝게도 정말로 살 가치를 못 느끼겠다고 했다. 지금 환경 면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여태까지 인생 중에 지금이 제일 금전적으로 무난하고 괜찮았다. 그런데 왜?라고 하면 정말로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어서. 무슨 자신감이었지 다들 이해해줄 것이라 믿었다. 내가 죽으면 아주 잠시 슬퍼할 뿐, 금세 잊힐 것이라 여겼다. 내가 죽으면 그냥 헤어질 뿐이잖아. 어차피 우리는 먼 사이였잖아.


 모두가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너는 살고 싶은 거라고 말한다. 글쎄. 글쎄는 글쎄 인걸. 별로 와닿지 않는데. 만약 죽을 거라면 지금은 확실히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또 말한다. 지금 이 충동은 호르몬의 문제야. 다시 약만 잘 먹으면 괜찮아질 수 있어. 그럼 약만 안 먹으면, 이 충동이 계속 이어진다면 죽을 수 있겠네. 죽겠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그럼 다들 또다시 말을 조심스레 이어간다. 그러다 후회하면 어떡해. 죽는 그 순간에 후회하면 어떡해. 그게 너무 무섭잖아. 안타깝게도 무섭지 않았다. 후회될 게 없어. 전부 다 버리고 싶어. 의미가 없는데 어떻게 후회하겠어. 단 하나 걸리는 게 있으면 애인 뿐이겠지. 하지만 괜찮을 거야. 전 애인의 죽음인데. 애인이 나 때문에 아프게 되더라도 약만 잘 먹고 병원에만 잘 가면 나를 잊지 않을까. 꼭 그랬으면 좋겠다.


 애인에게 이해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애인은 금세 내 생각을 파악했고, 어느새 나는 정신병원 입원 날짜를 잡은 채 상담하고 있었다. 흔한 일이라 생각했다. 정신병 걸린 애가 죽고 싶어 할 수도 있지. 아직 행동으로 한 거는 없으니까. 별일 아니라고, 입원까지는 아니라고 진단받을 줄 알았다. 준비도 없이 다음날 바로 입원했다. 사실 당인 입원이 가능했으나 도망쳤다. 코로나 시국이라 면회도 안 되는데 뻣뻣한 재질의 환자복을 입고 있자니 짜증이 확 밀려왔다. 손목엔 바코드 종이 끈이 달려있고, 수면안대조차 자살 시도 위험으로 하지도 못하고. 무엇보다 핸드폰이 없었다. 현대인의 심장이 없는데 나는 어떻게 여기서 하루를 보내야 할까. 의사 선생님이 와서 나를 설득한다. 왜. 자꾸 내게 왜라고 묻는다. 왜냐고 묻는다면 음, 그냥 제가 굳이 살아야 할까요. 이걸 또 해야 할까요. 저는 이제 노력하기도 싫은 걸요. 도망치고 싶으나 도망칠 곳이 없다. 개 같은 코로나는 병원에서까지 날 괴롭혔다. 가장 중요한 치료 프로그램이 없다니. 할 일이 없어서 벽지만 봤다. 벽지를 보다가 화가 나서 벽을 때리다가 병원복 상의로 목이라도 매달고 싶었다. 그럼 난 바로 경고받겠지. 응, 가만히 있자. 묶이기는 싫잖아. 그 정도의 이성은 있었다.


 할 일이 없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휴식인데 강제로 갖게 된 휴식은 정말로 개 같았다. 무료함과 따분함과 지루함과 또 쓸 수 있는 단어가 뭐가 있을까. 내 이야기만 3번째 반복해서 말했다. 교수님과 주치의와 복지 선생님이 집안 얘기를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면 보호해줄 가족은 아무도 없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오로지 애인 뿐인가요? 네, 애인 뿐이죠. 말하면서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나 정말로 곁에 아무도 없는 거야? 응, 그랬다고 한다. 얼핏 보이는 하얀 종이에 내 이야기가 가득하다. 주치의 선생님이 말한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OO님은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인 것 같아요. 많이 듣던 말이라고 해도 주치의 선생님한테 들으니 다르게 들렸다.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한테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기분. 그렇죠,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어요.


 어쨌든 나는 약을 먹어야 하고, 입을 벌리고, 잠을 강제로 자야 하고, 머리 위로 발소리가 계속 들렸다. 사람들이 무방비해진 내 영역 근처로 침입하려 한다. 잠은 또 오지 않고 1시간마다 약을 받으러 가고 억지로 자려한다. 그러니까 나는 억지로 쉬어야 했다. 이 와중에도 계속 애인이 생각이 났다. 불쌍해. 워낙 할 게 없기도 해서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정신병원에 있는 내내 애인은 쉬지 않고 내 상태를 눈여겨보았다. 나라면 그렇게 못할 것 같은 일을 애인은 아주 당연하단 듯이 해냈다. 코로나로 만나지도 못하는데 왕복 2시간 걸리는 병원에 간식까지 넣어주기까지 했다. 애인의 최선을 지켜보았다. 예전이라면 금방 끝나겠지, 하는 의심도 이젠 들지 않았다.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이 모든 것들이 진심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애인이 슬픈 건 또 싫었다. 아니, 사실 정신병을 낫기 위해 정신병원에 들어간 건데 이러다간 정말 정신병 하나 더 얻어서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갇혀 사는 건 너무 내게 맞지 않았다. 그러니까 보류로 남기기로 하자. 천천히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애인의 모습에 감명받아 삶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무슨 말을 했더라. 좀 쉬니까 나아지는 것 같아요. 저 자신한테 너무 엄격해서 그동안 괜히 더 힘들게 느껴진 것 같아요. 반은 진심, 반은 응, 바람이지. 그렇게 퇴원했다. 이르다고 했지만 자의 입원이라 그냥 나왔다. 더 이상 못 있어.


 얼마 안 있었는데 병원 밖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사실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조차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말을 하는 게, 웃는 게, 삶을 사려고 하는 것들 그 자체가 부자연스러움으로 다가왔다. 전부 포기한 채 정신을 놓고 있는 게 너무나 익숙해진 탓이었다. 퇴원했음에도 애인의 옆에 있다 보면 나는 쭉 가늠하게 됐다. 죽을까 살까. 잠든 애인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불쌍하고 서글퍼져서 그럴 수가 없었다. 쟤는 하필 나를 사랑해서 이런 고통을 안고 가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지만 어차피 그런 것들은 한둘이 아니기에 그냥 무시해버렸다. 그게 너한테도, 나한테도 더 나을 테니까. 무슨 생각으로 퇴원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애인의 옆이 아닌 게 싫었고, 무료함을 이겨내는 일조차 나는 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죽지 못한다면, 그냥 쉬는 상태로 있을 거면 병원보다는 집이 좀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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