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상한 사진관에서 시작된 이상한 결혼생활

캄캄한 밤 기록은 아침이었다.

by 마이분더





나는 시대를 앞서가는 요상한 웨딩촬영 기사님을 만났다. 자신은 프로패셔널한 사진작가이며 화보컨셉을 추구한다고 했다. 연신 자랑을 늘어놓으시더니 어느덧 촬영이 시작됐다. 전날 나는 자연스럽게 웃는방법들을 열심히 찾으며 태어나서 가장 오랫동안 거울을 보았다. 그런데 왠일인지 이날 나는 조금이라도 웃으면 아주 혼구녕이 났고 오로지 무표정으로 일관해야 했었다. 화보컨셉의 핵심은 무표정이라나 뭐라나. 아이러니 하게도 웨딩촬영장에서 익혀놓은 무표정은 그날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내가 시도때도 없이 남편만 보면 냉랭해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날 때문인 것만 같았다.









2013년 12월, 우리는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날 우리가 걷던 길에는 마스크도 없었고 서로에 대한 불만도 없었다. 맑은 공기를 그대로 마시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하루 이틀 남편과의 동거생활이 거듭될 수록 불만이 쌓여갔다. 남편은 심각한 투덜이에다 공감버튼이 고장난 로봇이었다. 버튼 하나 잘 못누르면 튕겨나가기 일수고 건전지는 쉽게 방전됐다. 생활력은 또 어떠랴. 투박한 겉모습과 달리 온실 속 마루인형처럼 자란 탓에 자신의 일에도 열정이 만렙이었다. 아참, 마이너스로 말이다. 이상하게 매일같이 마음이 편치 않은 날들이었다.


때이른 점심을 먹고 여느때처럼 각자의 핸드폰만 바라보는 오후였다. 고요한 적막이 어색함을 부르던 때 남편이 말했다. “오늘 저녁 뭐 먹을거야?” 점심먹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저녁 타령인지. 매일같이 들여다보는 먹방영상이 부른 참사다. 마음의 양식을 채워야지 말이야 뱃고래만 늘려가고 있다.


까마득한 옛날 우리에게는 분명히 반짝이는 날들이 있었다. 지금은 남편만 보면 째려보느라 레이저가 반짝이지만, 처음으로 함께했던 타국의 풍경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날의 햇살, 그날의 공기, 그날의 촉감처럼 둘 사이에 좋았던 날들도 선명하게 기억될 수만 있다면, 건조해져 버린 우리 사이가 조금은 촉촉해질 수 있을까?










어쨌든 결혼생활도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여지없이 남편에게 단단히 화가났던 어느날, 살아보기전에는 미쳐 알지 못했던 배우자 선택기준에 대해 기록했다. 화풀이로 써내려간 열 세가지 항목들을 SNS에 공유했다. 누군가 드라마속에서나 나올법한 인물이라 말했다. 그런가? 써놓고 보니 남편도 이중에 네개쯤은 속하는데 이정도면 괜찮은건가?"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오후 남편이 일찍 집에 왔다. "이런날에는 애버랜드지! 설마 비오는날 누가 놀이동산에 오겠어?" 라며 이제 막 하교한 아이를 데리고 환상의 나라로 떠났다. 아이는 신이났고 문명의 발전으로 우리는 15분만에 그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맙소사! 모두가 일심동체였다. 가득찬 인파에 일단 사파리 줄을 서고 헐레벌덕 호랑이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아이의 다음 목적지인 청룡열차로 향했다. 그나저나 남편과 함께 왔으니 호사는 누려야지. “저기 범버카 위로 쭉 올라가면 있으니 둘이 다녀와" 남편에게 말했다. 이참에 나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방금 개인 하늘을 바라볼 참이었다.


이제 막 엉덩이를 붙이려던 찰나, 그럼 그렇지 "아니 청룡열차가 어딨다는 거야!!" 잔뜩 성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세상에 내 기억이 틀렸다. 범버카 위에는 하늘을 나는 놀이기구가 있었고 알고보니 청룡이 아니라 비룡이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직원한테 "아이들이 타는 그...그..용머리 위에 연기나는 열차 어디있나요?" 이거하나 못물어보나? 여기가 외국도 아니고 말이야! 역시 남편에게는 없는 아홉가지 항목들이 문제였다. 아무튼 남편은 씩씩 거리며 비룡열차를 두 번 태워준 뒤 돌아왔다. 내가 두 번 타고 왔으니 일단 참는다. 어찌됐든 선택기준 2번 완전 탈락이다!!!!!


답답한 날이면 일기를 쓴다. B심 연필처럼 짙은 감정들이 어느새 H심 연필로 흐릿해졌다. 이상하다. 깊은밤 캄캄했던 날들이 잠시 끄적이는 기록중에 새벽내음을 풍긴다. 인생에서 아침이 사라진줄 알았던 어느날이었다.










만년주부의 하루는 무료하지만 수 없이 많은 감정들은바쁘게 움직인다. 이상하게 점점 불편해져 가는 감정들이 언제나 나를 괴롭힌다. 어느날 아이가 학교에 가고 덩그러니 놓인 아이 태블릿을 발견했다. 오늘 해야할 일들을 적어보기도 하고, 나에게 전하는 말을 기록하기도 했다.


기록을 시작하니 내가 보였다. 나의 기분, 나의 사람, 나의 물건, 나의 공간. 특별할일 없던 하루는 어느새 빛나고 있었다. 누구나 아는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가 특별하다. 나처럼 삶의 무게와 무기력함으로 감정이 불편해진 이들에게 삶이 건강해지는 기록레시피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 작은 기록들이 마중물이 되어 그들만의 특별함으로 반짝이게 하고 싶다. 깜깜한 밤하늘 위에 떠있는 작은 별도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삶의 무게에 짓눌려 점점 땅속으로 빠져버리고 말았지만 기록을 통해 깨달았다. 나는 땅속에 숨겨진 보석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아직은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는 스스로 나를 꺼내고 기록을 통해 밝은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다. 기록은 점점 더 나를 갈고 닦아 본연의 보석으로 빛나게 해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