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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심부름

왜 매번 남편은 심부름을 하고도 혼이 나는 것일까?

by 마이분더






단풍의 계절을 알리듯 10월의 달력도 군데군데 붉게 물들었다. 어쩐지 아이는 10월의 달력을 넘기며 손가락을 일곱 번 접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친정 엄마의 꽃게탕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붉게 물들어가는 꽃게와 달큼하고 구수한 국물을 당연스레 넘기던 가을이다. 결혼을 하고 마트에 보이는 냉동꽃게를 사온적이 있었다. 엄마의 꽃게탕을 그리며 적당히 비슷한 재료를 넣어 똑같은 모양으로 끓여냈다. 이번에도 당연스레 같은 맛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꽃게는 눈에만 보이고 입속에서는 사라져 버린 그런 맛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붉게 물든 공휴일이 많아질수록 점점 불편해졌다.


특히나 한 공간에서 하루 종일 온 가족이 모여 있는 건불편한 일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편한 일은 치우고 돌아서면 또 찾아오는 식사시간이다. 그토록 좋아하던 집밥과 대면 대면하게 된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집 생활비의 8할은 외식비가 차지한다. 이것은 내가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다니게 된 연유도 포함된다. 아무튼 이번 연휴의 첫날도 여지없이 외식으로 시작됐다. 집 근처 쇼핑센터에서 '아이방 등불 만들기 체험'을 한다기에 찾아간 곳에 때마침 탕수육 달인이 계셨고 그렇게 점심을 해결했다. 맛있게 먹었지만 생각보다 비쌌고, 굳이 무항생제일 것까지야 없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은 간단히 빵과 계란 프라이, 사과 한쪽으로 때우고 점심은 오랜만에 집밥을 해 먹기로 했다. 전날 하루 종일 외식으로 때운 것이 생활비와 건강에 영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건강의 상징 야채와 쌀쌀해진 날씨에 제격인 국물요리, 샤부샤부를 해 먹기로 했다. 여느 때처럼 심부름만큼은 일등인 남편에게 샤부샤부 재료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남편의 카톡으로 알배추, 청경채, 우삼겹, 팽이버섯을 적어 보냈다. 그사이 나는 육수 팩 3 봉지와 양파 한 개를 넣고 진한 육수를 우려냈다.


곧이어 남편이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입력한 값 그대로 정직하게 4가지 재료를 들고서 말이다. 알배추, 청경채, 우삼겹, 팽이버섯 딱 4가지 이외에는 다른 무엇도 없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우려진 진한 국물을 보니 내 마음도 좋았다. 그런데 남편이 말했다. "알배추가 8천 원이더라 외식보다 더 들겠어" 그 순간 나는 방금 좋았던 마음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부르르 짜증이 솟아올랐다. “뭐? 8천 원? 아니 그럼 사오지를 말던가 나한테 전화를 했어야지!." 솟아오른 짜증은 쉽사리 가라앉혀지질 않았다. 입력한 값 이외의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로봇 남편은 여지없이 오늘도 화를 불렀다.


세상 물정 모르고 알배추를 사오라고 한 나도 문제지만 세상에 8천 원이면 무조건 안사왔어야 된다는 걸 왜 모른단 말인가! 절약하겠다고 집밥 먹는데 금배추라니 생각할수록 열불이 났다. 급기야 여기저기 검은 반점까지 찍혀있는 알배추 상태는 내 마음 여기저기에도 검은점을 찍었다. 하기사 이 비싼 알배추를 누가 사갔겠는가. 여기저기 치이다 시들시들해진 알배추를 씻으며 단전부터 올라오는 답답한 마음이 여기저기 튀었다. 결국 샤부샤부를 먹는 내내 가시지 않았던 불편한 마음이 반찬투정을 하는 아이에게까지 번졌다. 금배추를 입에 넣자마자 맛이 없다며 뱉어버렸기 때문이다. 건강을 생각했던 집밥이 이렇게 화를 부를 줄이야. 역시 우리 집은 외식인 건가. 참으로 씁쓸하기 그지없는 집밥이었다.


적당히 화를 가라앉히고 소파에 앉아있는 나에게 남편이 커피를 사다 주었다. 늘 주문하는 헤이즐럿 라떼였다. 그런데 오늘은 분명히 일요일인데 왜 13일의 금요일 같은 것일까? 이번에는 헤이즐럿 라떼에 우유가 빠졌다. 이번엔 카페 직원의 실수였다. 그런데도 난 여지없이 남편에게 화가 났다. 늘 똑같은 커피를 주문하고 색깔만 봐도 우유가 빠졌는데 왜 또 그걸 그대로 가져온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남편은 오늘도 부지런히 욕을 먹었다. 그나저나 남편은 왜 매번 욕을 먹는데도 매번 심부름을 자처하는 것일까?


그날 밤 나는 8천 원짜리 금배추의 효능인지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왜 남편만 보면 그토록화가나는 것인지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8천 원짜리 알배추에 써버린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돈만 아끼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남편에게 마음을 아낀다. 부지런히 모아야 부자가 될 텐데 정말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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