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블리한 나
<러블리한 나>
“형용사는 명사를 꾸며주는 기능을 하는 단어야. ‘아름다운 하늘’이라는 말에서 ‘하늘’을 꾸며주는 ‘아름다운’이라는 단어가 형용사지. 네가 생각하는 선애는 어떤 선애야?”
며칠 전 딸에게 물었다. <형용사>라는 주제로 글을 쓰며, 나를 수식하는 형용사에 대해 오래오래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착하고 사랑스러운 선애지”
“그래?”
“응 엄마 이름의 뜻이 딱 그렇거든. 착할 선 사랑 애.”
“그러네. 나도 내가 사랑스러운 선애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이 보는 나는 어떨까?
엉뚱한 아름다움이 있는
복사꽃처럼 화사한
단아한
러블리한
솔직한
순박한
해맑은
캔디처럼 밝은
시와 활자에 푹 빠져 문학의 삶을 즐기는
시인다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스스로를 사랑하는
항상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장미처럼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나의 에세이 클럽 학우들이 보내준 목록이다. ‘고선애’와 함께 떠오르는 형용사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형용사를 만나다니 나는 정말 사랑받는 사람이다. 나 스스로를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의 에너지가 흘러넘쳐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해맑게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를 인식한다. 그렇다. 나는 나를 많이 사랑한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는 부모님께 사랑받지 못한 아이라 생각했다. 자존감이 낮았다. 내가 불쌍했고 내가 싫었다. 그런 생각의 뿌리에는 부모를 탓하고 타인을 원망하는 내가 있었다. 나는 그 부정적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밝은 사람이고 싶었다. 한순간 밝은 사람이 될 수는 없었기에 상당 기간 동안에는 밝은 사람인 척 연기를 했다. 그러면 타인도 내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평범한 아이인 줄 알고 그렇게 대해 주었다.
그러나 언제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고 싶었다. 해결되지 않는 결핍을 가진 채, 나 스스로 나를 얼마나 보듬어 주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사랑받는 게 좋았고 버림받는 건 너무나 힘들었다. 20대 후반에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 줄 것 같은 사람을 만났다. 부모에게서 받아 보지 못했던 사랑을 받았다. 나를 소중하게 여겨 주고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 그는 자신의 존재를 창피해 하지 않았다. 스스로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만나고 나서야 나란 존재도 소중하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는 연습을 많이 하고 나는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나는 전에는 좋은 것을 나중으로 미루기 위해 참고 견디는 것만이 최고인 줄 알았으나 모든 면이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멍든 사과를 먼저 먹고 예쁜 사과를 나중에 먹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딱 그 반대이다. 예쁜 사과를 먼저 먹고 나서 배부르면 안 먹는다. 이제 나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려 한다.
그런 덕분인지 종종 이런 말을 듣기도 한다. ‘과하게 해맑고 자기만의 세계를 좋아하는 사람.’ 일을 하다 너무 몰두해 피곤함이 느껴지면 견디거나 힘들어하지 않는다. 나가서 바람도 쐬고 잠시 쉬었다 온다.
작년에 보건소에서 잠시 일을 할 때 자가격리 통지서를 발급해 주던 때가 있었다. 민원 한 분씩 오면 전산에 개인정보를 입력하고 출력해서 드렸다. 대기자가 많지 않을 때는 괜찮은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면 마음이 다급해졌다.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하려고 하지만 대기자가 너무 많이 있을 때는 옆에 있는 동료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일할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않는 게 중요하다 생각한다. 일이 많아지면서 계약기간이 종료되는 시점에 몇 달 더 근무해 달라고 했지만, 나는 목표한 바를 이루었고 또 다른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계약 연장을 하지 않았다. 함께 일했던 동료 두 명은 계약을 연장했고, 코로나 환자들은 생각보다 더 많이 늘어났다. 일이 더 많아지고 그 뒤로 더 많은 계약 직원을 고용했을 테지만, 그 동료 둘은 일이 많아서 굉장히 힘들어했다. 처리해야 할 건수들이 많아지면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고 마음이 조급해 지곤 할 때 나를 떠올리면서 계약 연장을 하지 않은 나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일이 많아 지칠 때 “선애씨 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둘이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선애씨는 아무리 바쁘고 일이 많아도 나가서 바람 쐬고 오고 쉬엄쉬엄했을 거야.”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몰아세우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느긋하게 즐긴다. 나는 온전히 지금 오늘을 즐긴다. 일은 내게 있어서 오늘을 즐기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이 되어야만 하는 일은 없다. 나는 그런 성격이다. 의식적으로 지금 해야 할 일 중 가장 하고 싶은 일 먼저 선택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선순위에 둔다.
작년에 저혈압 증세로 한 달 간격을 두고 두 번 쓰러진 경험이 있었다. 그 뒤로는 나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내게 주어진 하루는 돈을 벌기 위한 하루가 아니다. 내가 삶을 즐기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우리는 누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쓰러지면서 이렇게 아프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나는 하루를 온전히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 지금 이 순간을 더 소중히 여기며 살고 싶다. 삶에 대한 태도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가지게 되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긴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밤이 되면 늘 만족스러운 하루를 마감하게 된다. 그 행복감은 계속해서 매일매일 쌓인다. 행복한 매일이 쌓이고 쌓여 내 인생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읽고, 내 생각 정리하기, 좋아하는 커피 마시면서 또는 산책을 하면서 자연을 느끼기, 내게 주어진 시간 감사하기. 이렇게 살아가다 보니 나는 내 삶을, 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는 나만의 케렌시아를 갖고 있다. ‘케렌시아(Querencia)’라는 말은 스페인어로 안식처를 뜻한다. 나만의 휴식처를 만든다는 것.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케렌시아가 되고 싶다. 그렇다면 나의 케렌시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는 일을 먼저 한다. 나의 카렌시아에서 충분히 나를 돌보고 나를 사랑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 그런 뒤에 누군가를 사랑할 힘을 만든다. 사람은 누구나 소중하고 반짝이는 별과 같은 존재다. 나는 스스로 빛나는 가치가 있고 꽃처럼 환하게 미소 지으며 살아가길 원한다. 그렇게 나는 ‘착하고 사랑스러운 선애’로, 내 사랑하는 이들을 ‘반짝이게 하는 존재’로, 오늘도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