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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어느 날의 일기

은하수학교를 소개합니다 (1)

by 교육혁신가 이현우


하늘은 잿빛이었다. 비가 내리지 않았지만, 구름은 한없이 무거워 보였다. 눅눅한 공기를 뚫고 허겁지겁 교문을 통과했다. 텅 빈 운동장, 차가움이 감도는 복도, 반듯하게 정렬된 교실. 이젠 익숙한 풍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다.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버티냐” 친구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무너질 듯, 그러나 여전히 버티며 서 있는 하루를 반복하고 있었다.


반에 들어서자 아침 조례가 시작되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단호한 목소리로 출석을 부르셨다. 나는 서둘러 책가방을 열었다. 바닥에 쏟아지는 공책들을 주워 담으며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어제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수행평가 과제가 널브러져 있었다. 조례가 끝나자마자 선생님은 우리에게 “곧 시험이다. 조금만 더 힘내자”라는 상투적인 말을 던지고는 복도를 나갔다. 그 말이 오늘따라 공허하게 들렸다. 친구들의 고개는 다시 내려가고, 책상 위에서 엎드려 있거나 몰래 스마트폰을 보는 친구들만 남았다.


첫 수업은 수학이었다. 선생님은 반듯한 필체로 칠판에 복잡한 방정식을 적으며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회색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진로 상담 시간에 대한 불안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면 담임 선생님과 또 진로 상담을 해야 했다. 선생님은 매번 같은 질문을 던지신다. “민수야, 넌 대체 뭐가 되고 싶니?” 그리고 나는 매번 멈칫했다. 무언가 되고 싶은 마음은 있었을 것이다. 뭔가를 하고 싶은 꿈도 있었을 거다. 그런데 그 꿈이 무엇인지, 언제부터 사라져 버린 것인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는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나를 짓누르기만 한다.


점심시간이 되자, 친구들과 급식실로 몰려갔다. 급식실은 아이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소란스러웠다. 별다를 것 없는 점심이지만, 오늘도 무사히 한 끼를 먹어낸다는 생각에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매일 비슷한 식사, 비슷한 대화, 비슷한 고독감. 그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조차 모른 채 떠밀려 살고 있었다.


오후에는 영어와 과학 수업이 이어졌다. 시험기간이라 음악 같은 예체능 수업은 영어로 대체되었다. 선생님은 중요한 시험에 나올 문제들을 하나씩 설명하며 "이건 정말 잘 알아둬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셨다. 필기를 하면서도 가끔 의문이 들 때가 있지만, 일단 시험에 나온다니 머리에 쑤셔 넣고 있었다. 몇몇 친구들은 집중하는 척하면서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스마트폰 화면에 몰두하는 애들도 있었고, 책상 위에 팔을 괴고 졸음과 싸우는 애들도 보였다. "또 이렇게 하루가 지나가는구나."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릴 때, 내일의 기대감은 희미해졌다.


마침내 방과 후가 되었지만, 고등학생의 하루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야자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7시, 교실은 다시 한 번 공기의 무게를 더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지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공부에 집중하려 애쓰고 있었다. 교실에는 연필 긁는 소리, 조그맣게 울리는 휴대폰 알림음,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나는 오늘도 무엇을 위해 이 시간을 견뎌야 하는지 생각하며 노트 속에 적힌 문제를 바라보았다. 야자 시간이 끝날 즈음, 침침해진 눈을 비비며 교실을 나섰다.


“시험이 이틀 남았는데, 아무것도 공부 못 했어.” 친구가 말했다. 사실 이미 다 공부해 놓고도, 다른 애들을 의식하며 내뱉은 말이었다. 친구들은 겉으로 ‘네가 그럼 그렇지!’ 하며 웃고 있지만, 이들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는 옆 친구를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가 친구들의 관계를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이곳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 같다. 언제까지 이런 짓을 반복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복도 게시판에 붙은 한 포스터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에 붙어 있었지만, 그 문구는 마치 나를 부르는 듯 했다. “네 손으로 찐학교를 만들어 봐. 해야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걸 해!” 마치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별빛처럼, 그 한 문장이 내 심장을 쿵 하고 울렸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그동안 묶여 있던 내 목소리가 비로소 세상에 드러날 수 있다는 희망. ‘이곳이라면 정말 행복한 학교를 수 있지 않을까?’ 미지의 세계가 열리는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나를 기대하던 새로운 가능이 열리는 희망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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