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대로 동행 Jun 08. 2024

단 둘만의 식사란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시간

결핵 치료를 받는 고3 둘째 아들을 위해 매월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한다. 채혈검사가 끝나자마자 검사를 위해 식사를 거른 아들과 함께 푸드몰에 가서 식사를 시켰다.


 아들과 마주 앉아 짜장면, 볶음밥을 시켜서 먹는데 마침 우리 테이블 옆에 아빠와  딸이 다정하게 앉아서 식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름 신경 쓴 듯한 외출복을 입고 딸과 마주 앉아 두런두런 얘기하며 식사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갑자기 내 눈에 크게 오버랩되었다.


나는 아빠와 함께 저렇게 마주 앉아 식사를 한 게 언제였던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아빠가 누워만 계신 채로 지낸 시간이 2년여였고, 그 이전에는 코로나가 덮쳐서 3년 가까이 속수무책으로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도 사는 게 바쁘고 정신없다는 핑계로 아빠와 식사할 기회를 통 내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고 보니 내 생애를 통틀어서  아빠와 저렇게 마주 앉아 식사를 한 적이 별로 없다.  

나는 늘 바쁜 게 당연한 채로 살았고, 그런 딸을 아빠는 늘 지켜만 봐주셨다. 그나마 기억나는 건 내가 대학 졸업 후 취업했을 때, 아빠가 좋아하는 집 부근 광양불고기로 모셨던 것이다.


20대 후반, 한창 발랄하고 의욕 넘치는 직장 새내기였을 때, 아빠는 대학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취업한 맏딸을 늘 자랑스러워하셨다.   당시 우리 집은 반지하에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그럼에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대기업에 취업한 딸은 아빠의 큰 자랑이자 자부심이었다.


딸이 취업하자마자 아빠 얼굴에서는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았고, 내가 퇴근할 무렵이면 기다리셨다가 “우리 딸, 오늘 하루 수고 많았구나."라며 안방문을 열고 반겨 주셨다. 가끔 아빠가 친구들과 통화하는 내용을 엿들으면 상기된 목소리로 “우리 딸이 00 회사 기획팀에 취업했잖아. ”라면서 평소에 좀처럼 하지 않던 딸 자랑을 하느라 신나 하셨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내가 아빠를 가장 행복하게 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뿌듯해하시는 아빠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어, 하루는 퇴근 후 아빠를 집 부근 광양불고기로 나오시라고 불렀다. 생계를 위해 일 나간 엄마를 대신해 집을 지키고 있던 아빠는 딸의 뜬금없는 부름에 처음에는 “괜찮아. 집에 있는 밥 먹자.”라고 만류하셨다.


그러나 딸이 거듭 사정하자 마지못한 듯이 나오셨는데 식당에서 나는 한눈에 아빠를 알아봤다.

집에서 나름 가장 신경 쓴 좋은 재킷을 입고 저 멀리서 아빠가 두리번두리번 나를 찾고 계신 것이었다. 딸을 생각해서 저녁 늦은 시간 마다하지 않고 식당에 나와준 아빠가 고마워 한달음에 아빠에게 다가갔다.


목발을 짚은 아빠는 식당 안쪽까지 들어가는 걸 늘 꺼려하셨다. 더 걷기도 힘들거니와 들어가는 동안 집중되는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얼른 아빠 쪽으로 달려가 미리 맡아놨던 문가 옆 자리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날 내가 받은 월급으로 난생처음 아빠에게 맛난 고기로 식사를 대접했다. 이북 평양출신이라 평양냉면을 좋아하셨던 아빠는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시던 광양 불고기는 딱 1인분만 주문하신 뒤 서둘러 냉면을 주문하셨다. 그러면서 “냉면 속에 고기 넣어 먹으면 맛있다. 그리고 평양냉면은 절대 가위로 잘라서 먹으면 안 돼.”라면서 나에게 팁을 전수해 주셨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불고기를 넣고 자르지 않은 평양냉면을 먹었다.


 그날 우리는 연기 자욱한 고깃집에서 모처럼 딸과 아빠, 둘만의 대화꽃을 피웠다. 변덕스러운 직장 상사 흉을 봤고, 사회생활이 힘들지만 할만하다며 나름 아빠를 안심시키느라 거드름도 피워봤다. 아빠는 딸의 투정, 거드름 등을 말없이 들으시며 마냥 흐뭇해하셨다. 그날 늦은 밤 아빠를 모시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목발을 짚으신 아빠에게 보폭을 맞추느라 천천히 걷던 그 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로부터 한참 후,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 후 교회 부근에 있는 작은 호텔의 양식당으로 모셔서 아빠가 좋아하시던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그때 아빠는  먹음직한 스테이크를 보고 딱 한 마디 하셨다.

“이 비싼 것을 네가 사주다니... 아빠 마음이 좀 그렇네.”


식사 앞에서 딸이 돈 쓰는 것을 못내 마음 쓰셨던 아빠.

아쉽게도 이 두 기억이 아빠와 내가 단 둘이 식사했던 전부이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아빠와  제대로 식사 한 번 못한 채로 늘 그게 당연한 듯이 살았다.

그렇게 직장을 다닌 지 3년 차 되는 해에 남편과 결혼을 했고  결혼 후 아이를 유산한 뒤 건강상 문제로 직장을 그만두기로 했다.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부모님께 알린 뒤 다음 날 사직서를 내려했는데 그날 밤 12시가 넘은 시각에 부모님이 직접 집에 찾아오셨다.


딸이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나오는 게 영 마음에 걸리셨던 것이다.  이미 내 마음은 정했지만 밤늦게 찾아온 부모님께 미안함이 들어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결국 나 대신 남편이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 늦은 밤, 어깨가 쳐진 채 문을 나서시던 부모님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한때는 아빠의 자랑이자 뿌듯함을 줬던 맏딸이 그 이후 계속 아등바등 사느라 고생하는 모습만 연이어 보여드리고 말았다. 퇴직 후 호기롭게 시작했던 사업은 결국 빚만 안고 망했고, 6년 동안 아들만 셋을 낳느라 전쟁 같은 육아 생활에 치인 채 늘 허덕이며  살았다.

결국 나는 아빠와 단둘이 멋진 식사를 대접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보내드리고 말았다.

이제 딸이 월급 타서 한 턱 쏜다며 아빠를 모시고 불고기와 자르지 않은 냉면을 먹으며 즐거워하던 시간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다.


내 옆에서 환한 얼굴로 서로의 밥을 비벼주고, 두런두런 얘기하며 먹는 그 부녀는 알까.

지금 단 둘만의 식사가 누군가는 가질 수 없는 축복의 순간임을.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음은 아직 서로 사랑할 시간이 남아있다는 뜻. 살 만한다는 뜻이니까.


아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때 "아빠, 미안해요. 힘들게 사는 모습만 많이 보였어서 미안해요."라고 사과했었다.

뵐 수만 있다면 다시 말씀드리고 싶다.

"아빠와 단 둘이 식사할 기회를 많이 못가졌던 거 미안해요.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갈 줄 몰랐어요."

이전 01화 나는 네 발로 걷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