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밤 전쟁으로 여전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성숙하지 못했던 나 자신에게 계속 화가 났고 실망스러웠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의 얼굴을 웃으며 바라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고 월요일 병원 진료와 센터의 놀이치료를 아이와 함께 갔다.
놀이치료 선생님과 의사 선생님께 나는 나의 울분을 쏟아내듯 고민과 어려움을 토로했다.
사실 뾰족한 수는 없었다. 약을 변경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곧 공개 수업과 상담도 있어 상황을 더 지켜보기로 할 뿐이었다.
하지만 상담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고 다시 한번 마음을 고쳐먹자고 생각했다. 늘 들어온 아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정말로 지키고 싶은 생각에 휴대폰에 기록해 두었다.
떼의 조짐이 보이면 주의를 환기시켜라.
떼쓸 때 자극하지 마라.
평소에 칭찬을 많이 해줘라.
허용 시간을 남편과 합의해라.
너무 과하게 제재하지 마라.
힘들 때마다 이 문장들을 되새기며 스스로 안정을 찾기를.
드디어 대망의 공개수업이 있는 날이다. 두 번째 큰 산을 넘기 위해 나는 전날부터 긴장이 되었다. 아이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오랜만에 화장을 하고 트레이닝복 대신 분홍 트위드 재킷과 정장바지를 입었다. 몇 년 동안 꺼내지 않은 체인백도 들었다.
같은 반 엄마들을 교실 입구에서 만났다.
안녕하세요!
얘기를 나누던 엄마 둘의 눈이 잠깐 커진다. 늘 마스크를 쓰던 모습만 봐서인지 마스크를 벗고 차려입은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 것 같았다. 이내 여자들 특유의 칭찬과 유머로 긴장감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1학년 아이들은 조별로 모여 앉아있었다. 교실을 빙 둘러싼 부모님들이 반가우면서도 낯선지 토끼 같은 눈들이 이리저리 헤맨다. 우리 아이도 3조에 앉아있다. 아이 뒤로 가 잘하라고 말하고 수업이 시작된다.
더운 날씨 탓인지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이지 땀이 삐질 날 정도로 더워져 외투를 벗었다. 지금 내 마음속엔 이 생각뿐이다.
제발 한 시간만 잘하자. 한 시간만 버텨줘. 울지 말고 떼쓰지 말고.
수업 전에 인사할 때 운 흔적인지 콧물 자국이 보인건 착각일 거라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상담에서 들은 바로는 앞 시간에 실제로 울었다고 한다). 실전에 강했던 우리 아이니까 오늘도 분명히 잘할 것이다.
잘해야만 한다!
다행히 아이는 텐션이 높긴 했지만 수업에 집중도 잘하고 큰소리로 발표도 잘했으며 친구들 칭찬 박수를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했다. 무릎을 꿇고 앉거나 한 번씩 흥이 주체가 안될 때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 액션은 취했지만 수업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니 괜찮았다.
수업을 보면서 경직되어 있던 내 얼굴도 서서히 풀리고 웃음마저 띠며 어느 순간 수업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가장 걱정되었던 게임이 시작되었다. 글자 하나씩을 들고 돌아다니며 친구들과 가위바위보를 하고 서로 단어를 얘기한 후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선생님도 물론 나도 수업이 한순간에 망쳐질까 조마조마했지만 걱정과 다르게 아이는 친구들과 편하고 즐겁게 게임에 참여했다. 졌다고 울지도, 하기 싫다고 떼를 쓰지도 않았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다! 성공이다!
혹시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어 주변 엄마들 얼굴 보기 민망스러워질까 하는 걱정도 덜어도 되었다.
수업이 무사히 끝나고 나는 아이에게 너무나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수업 중간중간 아이와 눈이 마주칠 때 내 눈에선 꿀이 뚝뚝 떨어졌으리라!
내 마음속 롤러코스터가 하늘로 슉하고 오른다.
4교시 수업을 보고 아이들은 그대로 남은 채 부모들은 돌아갔다. 같은 반 엄마 둘과 같이 나와서 걸었다. 그때 붙임성 좋은 여자 애 엄마가 밥이나 차를 하러 가자한다.
이게 웬 떡인가. 그렇게도 기다리던 순간이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학교 근처 국숫집에 들러 국수를 한 그릇씩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용기 내어 남자 애 엄마의 번호도 받았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진 나는 커피도 한 잔씩 샀다.
나는 이미 하늘에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 마음속 걱정이 사라지고 오늘 날씨처럼 반짝거리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든 순간은 친구 엄마들에게서 들은 말 한마디였다.
" 아이가 너무 잘하던데요. 집중도 잘하고 완전 분위기 메이커던데요?"
나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오늘 긴장해서 그런 거지 평소엔 과할 때가 많다며 오늘도 너무 튀지 않았냐며 겸손의 미덕을 보였다.
나에게 이런 순간이 오다니. 기쁘면서도 벅차고 감격스러웠다. 아이와 우리가 노력해서 이룬 결과였다. 이 날을 위해 수없이 많은 이미지 트레이닝과 약속을 해왔다. 컨디션 조절도 필수였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앞으로도 많은 고난과 역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짝이는 기억, 우리가 노력하고 이룬 것들을 떠올리며 그 힘든 순간들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정말 잘했어! 노력해 주어서 고마워! 사랑해!
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