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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리 Oct 11. 2022

육아에 숫자를 지웠다

그리고 우린 다 같이 행복해졌다.

육아의 세계를 숫자의 세계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엄마가 되면 수많은 숫자를 마주하게 된다. 개월 수별 평균 키와 몸무게부터 먹고, 자고, 싸는 횟수 등에서도 모범적(?) 기준이 존재했다.


첫 아이를 낳고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했을 때 이 숫자들은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되어주었다. 매일 분유는 얼마나 먹는지, 똥은 몇 번 는지, 잠은 몇 시간 잤는지 등을 적어놓고 육아 지침 속의 숫자들과 비교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획일적인 육아 기준이 너무 무례하고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속에는 아이 개별 특성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맞춰주며 돌봐야 할 부모들이 오히려 자신의 편의를 위해 아이의 생체리듬을 억지로 맞추게 하는 같았다.


그중 하나는 바로 수유 텀이었다. 수유 텀은 아기 분유를 먹이는 시간 간격을 한다. 보통 육아 지침에는 3~4시간에 한 번씩 수유하라고 안내되어 있다. 초기에 수유 텀을 잘 맞춰놓으면 육아가 한결 수월해지기 때문에 모두 이 규칙적인 루틴을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육아를 쉽고 편안하게 하는 수유 텀을 맞춰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아기가 배고파서 울어도 수유 텀을 맞추겠다는 일념으로 아기가 원하는 젖병이 아닌 쪽쪽이를 물려 시간을 끈다. 그리고 한 번 수유할 때 많이 먹여야 다음 수유 텀까지 버틸 수 있다며 더 이상 안 먹겠다고 입을 꾹 다문 아이의 입을 억지로 벌려 먹이려고 한다. (아기가 수유 텀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배신감이 상당할 것 같다.)


부끄럽게도 나 또한 신생아 육아를 하던 때 수유 텀을 잡아보려고 노력했었다. 그래서 아기가 분유를 안 먹겠다고 의사표현을 했음에도 더 먹이겠다며 젖병을 물렸다. 그러다 아기가 심한 구토를 했고 그때 현타가 왔다. '내가 지금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수유 텀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는 아이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없었다.


비단 수유 텀뿐만이 아니다. 육아의 세계에는 그 시기마다 해내야 할 과업들이 존재한다. 6개월 이전에 뒤집기를 해야 하고, 10개월 무렵에는 집게손으로 콩을 집을 수 있어야 하며, 15개월 안에는 걸어야 한단다. 이건 아기가 스스로 해내야 할 과업이다. 아이가 커감에 따라 엄마의 과업도 존재한다. 6개월 이전에는 이유식을 시작해야 하고, 돌 전에 젖병을 끊어야 하며 2년 내로 쪽쪽이를 끊어줘야 하는 게 대표적이다.


명확한 가이드가 되어주어 고마웠던 숫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내 목을 죄어오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6개월, 12개월, 18개월 등 아기의 발달을 평가하는 영유아 건강검진을 앞뒀을 때는 마치 시험대에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건강검진 결과지에 한 항목이라도 '주의'가 뜨면 마치 우리 아이에게 큰일이 있는 것 같이 느껴져 걱정과 자책으로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 머리둘레가 상위 1%로 너무 큽니다. <6개월 영유아 건강검진에서 들은 소견>


- 운동발달 능력이 조금 떨어지네요. 손가락으로 원하는 걸 지목도 못하나요? 흠... 2개월 뒤 다시 재검받으러 오세요. <12개월 영유아 건강검진에서 들은 소견>


숫자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남들과 다르다. 부족하다는 말에 조바심도 나고, 걱정도 됐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주지 못하고, 자꾸 부족하고 못난 것만 찾으며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고 있던 나는 못난 엄마였다.


그런데 그런 엄마의 걱정이 무색하다는 듯 아이는 자기만의 속도로 본인 앞에 놓인 발달 과업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갔다. 6개월에는 못했던 뒤집기를 7개월 접어들자마자 되집기와 함께 한 번에 하고, 돌 무렵에는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 1회 수유량은 기준치(200ml)에 한참 못 미치는 100ml였지만, 지금 키와 몸무게는 상위 10프로로 아주 잘 자랐다.


그때 깨달았다. 아이마다 각자의 시계를 가지고 태어나 자신만의 속도대로 자라고 있음을 말이다. 엄마는 그저 아이의 속도를 존중해주며 아이가 자신의 과업을 잘 해결해가기를 믿고 기다려주면 되는 거였다.


흔히 육아를 장거리 마라톤에 비유한다. 그런데 우린 그냥 뛰기도 힘든 마라톤 코스에 '숫자'라는 허들을 줄지어 세워놓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눈앞에 놓여있는 허들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해서 아이가 커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를 힘들게 하는 허들을 치우자. 그리고 아이의 웃음소리,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우리 가족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눈을 돌리자. 숫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가족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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