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갑자기 닥쳐온 불행에 대해 곱씹는 건 끝이 없을 것 같다.
아빠가 갑자기 떠났고 그로 인해 엄마의 정신이 온전치 못해졌고, 당장 슬픔을 잊어보고자 급하게 취업한 회사에서 공항장애를 얻게되고, 집이 없어지고 반지하로 이사가고....
나열하니 2년만에 이런 불행이 따따따블로 오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생각을 달리 하기로 했다.
아빠가 떠난 건 뭘로 말해도 좋게 생각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난 취업을 했고 운 좋게도 보증금을 안 내는 조건으로 반지하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이 반지하에서 하루 종일 떠난 아빠와 성북동 집을 뺏긴 현실에 사로잡혀 울고 불고 있을지,
토익공부든 홈트레이닝이든 혼자만의 공간에서 나를 가꾸어나가며 불행에서 벗어날지는 전부 내 마음가짐에 달린 일이다.
난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고, 나름 20대 여자라고 아지가지한 소품들을 사서 집을 꾸며보기로 했다.
인생 첫 자취
그리고 여름 장마철 반지하 입성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비가 내리는 날엔 강인한 생명력으로 다시 태어난다. 진짜 배울 점이 많은 생명체다.
벽지고 가구고
곰팡이가 없는 곳이 없다.
매일 아침 환기를 하고
비 오는 날은 일반 제습기, 에어컨 제습기능 전부 다 틀어놓는다.
전에 살던 남학생이 장마철에 문을 닫아놓고 2년간 방치한 집이라는데 그래서일까?
이 반지하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실미도'같다.
주방 환풍기에는 필터가 없는데, 전에 살던 남학생은 상남자였던 거 같다.
고기 굽는데 생각보다 필터가 없어도 될 거 같다며 환풍기 필터를 빼서 키우는 화분에 데코로 사용했다고 한다 (대체 왜..?)
나름 청소를 잘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냥 정리정돈 수준이었다.
곰팡이 제거/ 환풍기 청소는 사람 써야된다..
반지하에 살게되니 너무 습하고 > 습하니 곰팡이가 생기고 > 그래서 꿉꿉한 냄새가 나고
무한 반복되기 때문에 매일 아침 출근할 때 제습기를 틀어놓고 가는 루틴이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돌아와서, 잘 때
하루 3번 제습은 필수다.
고층빌딩에 살 땐 모기들도 날개짓해서 올라오기 힘들어서인지 모기가 일체 없었다.
반지하에 오니, 날아다니는 곤충 뿐만 아니라
땅에 이렇게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메이저 벌레: 초파리, 모기, 개미
전국민이 알고 퇴치법을 검색하면 나오는 메이저 벌레부터
마이너 벌레: 쥐며느리, 뱀잠자리, 노린재, 알 수 없는 빨간 거미..
어떻게 집에서 나가달라고 부탁해할 지 감도 안 오는 마이너 벌레들까지.
피할 수 없으면, 곤충박사가 되어 잡학다식해질 수밖에..
자다가 샤샥 소리에 눈을 떠봤을 때 귀뚜라미가 머리맡에 있었는데 (난 아직도 귀뚜라미라 믿는다. 절대 곱등이가 아닐 것이다..) 난 겁에 질리면 소리를 지르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냥 기절하는 사람이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나의 취미는 산미 가득한 아메리카노와 바스크 치즈케이크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아메리카노가 한 잔에 7천원이어도 상관 없었다.
친구들한테 오늘은 내가 사줄게~ 라는 대사도 많이 했고, 고등학생 때부터 절친과는 30만원 어치 생일선물을 주고 받는게 당연했었다.
오히려 벌이는 고등학생 때보다 지금이 훨씬 늘었는데도, 씀씀이는 3배로 줄어들었다.
자취를 시작하니 숨만 쉬어도 돈이 들며 (당연하다. 난 숨 쉬려면 제습기를 틀어야한다. 다 전기세로 나간다.)
물티슈 한 장을 뽑아서 마르면 걸레포로 쓴다.
식당에서 250ml 물을 일회용으로 제공하면 챙겨오는 게 당연해졌고,
한 잔에 5천원이 넘는 내 취향 ★산미 가득 아메리카노★는 회사 믹스 커피로 대체한다.
나의 인생 책이라 한다면
[양귀자-모순] [츠지 히토나리- 사랑후에 오는 것] 부류의 사랑과 인생 철학을 다룬 소설이었으나,
집이 없어지고 나니,
난생 처음 나랑 결이 안 맞는 아저씨들(존리.. 기요사키.. 세이노.. 김승호..)의 위대함을 깨닫고 경제 도서를 읽게 되었다.
또한 강박처럼 행했던 월 2회 이상 신작 도서 구입하기는 집이 좁아져 일시 정지하게 되었고, 모교 도서관을 친한 교수님 찬스로 이용하고 있다.
많이 버는 건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없지만, 많이 쓰지 않는 것은 당장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가계부를 적기 시작하면서 불필요한 식비와 올리브영 쇼핑, OTT 구독료가 많이 줄어들었다.
또한 36층에 있을 땐 공감할 수 없었던 동네의 이야기를 뉴스에서 접하게 되면,
1차. 가난한 현실에 화가 나고
2차. 나 역시도 반지하에 있다가 잠겨서 큰일나는 거 아닌가? 라는 두려움이 든다.
자취는 하고 싶었지만, 그게 반지하에서는 아니었다.
홀로서기를 하고 싶었지만, 아빠가 돌아가셔서 하고 싶진 않았다.
취업을 하고 싶었지만, 수습기간 3개월에 월급 80%를 받으면서 일하고 싶진 않았다.
모든 게 내가 원하는 컨디션으로 진행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사위는 던져졌고 시간은 흐른다.
당장 다음 주에 폭우로 내가 사는 반지하가 잠겨서 그리운 아빠 곁으로 가게 될지
아니면 며칠 전에 넣은 이직 이력서가 합격해서 강남 쉐어하우스로 넘어갈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일단 나에게 처한 불행을 잠깐 제쳐두고 자기 관리에 몰두해야 하며
오늘도 환기하고 곰팡이를 막아야한다는 것이다.
아부지, 저 깔끔하게 청소 잘 해놓고 혼자 살기 시작했습니다
놀러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