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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타인을 챙겼던 의사

죽음은 삶의 자화상이다. 자화상에서 그린 사람의 모습을 알 수 있듯, 죽음은 망자의 삶을 보여준다. 죽음에는, 어떻게든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모습이 담겼다.


새해를 몇 시간 앞둔 한 해의 마지막 날, 해마다 이 시간은 일깨워주는 게 있다. 내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이 누구인지를. 몸은 어디에 있든 마음은 그들에게 가 있다. 희망을 품은 새해를 함께 맞이하고 싶기에.


그런 이유만으로도 그의 죽음은 아프다. 그에게도 사랑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진료를 마칠 무렵, 예약하지 않고 찾아온 환자의 진료 요청만 수락하지 않았어도…


그는 환자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됐다. 예약 환자 외에 당일 접수한 환자의 진료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면… 환자를 향한 배려심이 많지 않았다면… 죽음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처럼 한 해의 마지막 날, 사랑하는 이들과 보냈을 것이다.

“서울 대형 병원서 정신과 진료받던 환자가 의사 살해.”


2018년의 마지막 날 저녁, 휴대전화에 속보가 떴다. 회사 속보를 즉각 확인하는 건 중요한 업무인데, 클릭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속보를 확인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에서 진료받던 환자가 의사를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는 어느 병원인지, 살해된 의사가 누구인지 나오지 않았지만, 추론할 수 있었다. 종로구에 있는 대학병원이라면 강북삼성병원일 것이고, 월요일 오후에 정신과 진료가 있는 의사라면 내가 아는 그분이다.


고 임세원 교수님.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 메신저에 접속했다. 손끝은 그의 프로필로 향했다. 프로필 대화명은 “Today is the best day of my life.” 몇 달 전 통화한 후 봤던 그대로였다.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


생애 최고의 날에 살해된 것이다. 자신의 환자로부터.


그는 예약 없이 찾아온 자신의 환자를 배려하는 마음에 당일 진료를 수락했다가 살해됐다. 급하게 병원을 찾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환자의 이야기를 듣는데 피해망상이 심해 보였다고 한다.


“내 머리가 언제 터질지 몰라요. 병원에서 내 머릿속에 폭탄을 심어놨으니까!”


환자는 흥분해서 흉기를 꺼내며, 병원에 있는 모든 사람을 공격하겠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옆문으로 피했지만, 위험을 알리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다가온 간호사 뒤로 숨을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본인이 살려고 했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도. 그는 환자가 간호사를 공격하려 하자 달려가 의료진과 대기 환자들에게 위험을 알렸다. 환자는 임 교수 쪽으로 돌렸고 그는 살해됐다.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타인을 챙겼던 그의 마지막 순간은, 이기심과 분노로 가득 찬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어떤 마음이어야 가능한 것일까.


그는 평소 환자들에게 깊은 애정을 쏟는 것으로 유명했다. 마음에 병이 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당시 빈소가 마련된 병원에서 유족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기서도 그가 얼마나 환자들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의 자랑이었던 임세원 의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의료진의 안전이 지켜지고, 모든 사람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사회적 낙인 없이 적절한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생전에 그는 정신질환자들이 편견에 시달리지 않고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했다. 고인의 가족은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유족은 가해자를 향한 원망 대신 ‘우리 함께 살아보자’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유족이 보여준 품격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크게 감동받았다. 의료계에서는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가 발생하지 않길 바랐던 그의 뜻을 더 널리 전하려는 움직임이 커졌다.


그의 의인적 모습은 우리 사회에 묵직한 울림과 함께 의료인의 진료 중 안전 보장이라는 과제를 던져 줬다. 국회는 의료기관 내 의료인과 환자의 안전을 강화하고 의료인 폭행 시 가중 처벌하는 내용의 일명 ‘임세원법’을 2019년 4월 통과시켰다. 보건복지부는 2020년 9월 임 교수를 의사자(義死者)로 인정했다.


* 의사자 - 직무 외의 행위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 또는 신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과 신체의 위험을 무릅쓰고 구조 행위를 하다가 사망한 사람.


나는 그와 만난 적은 없다. 대여섯 번의 전화 통화, 그리고 조만간 뵈러 가겠다는 약속. 그가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쯤 통화한 게 마지막이었다.


그의 친한 친구 몇 명과 친분이 있었기에 첫 통화 때도 어색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취재원과 기자로서 대화를 이어갔다. 이야기를 거의 다 주고받은 후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나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교수님, 저 우울증이 있었어요. 지금은 다 나았고요.”

“진짜 괜찮으신 거죠?”

“네. 제가 읽으면 도움이 될 만한 책 좀 추천해 주세요.”

“…”


몇 초간 조용했다.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했다. ‘이분은 책을 안 읽으시나?’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단호하게 외쳤다. 마치 퀴즈의 정답을 이야기하듯.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하하. 그 책은 교수님께서 쓰신 거잖아요. 죄송한데 너무 웃겨요.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는데, 본인 책을 추천하셨어요.”


자신의 책을 “정답!”이라고 외치듯 말한 그에게서 아이 같은 순수함과 천진함을 느꼈다. 그도 크게 웃었다.

그를 알게 된 건 그와 친한 의료진을 통해서였고, 그중 한 명이 그가 쓴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라는 책을 읽어 보라고 추천해 줬다.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임세원 교수는 우울증 명의니까 그 책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겪은 이야기겠구나’였다.


예상은 빗나갔다.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는 본인이 우울증을 겪으면서 쓴 경험담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큰 사명감을 가지고 있고, 환자들을 향한 사랑이 큰 의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우울증 환자들이 적극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투병을 세상에 알렸다. 환자들을 끌어안기 위한 것이었다. 정신과 치료를 둘러싼 오해와 편견이 환자들이 치료를 주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 또한 우울증을 겪은 적이 있었고 자살 예방과 관련한 꿈이 있기에 그를 향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몇 차례 더 통화하면서 꿈에 관해 말했다.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환자와 의료인 사이의 가교 역할을 꼭 할 것이라고. 그는 나의 꿈을 지지했고 함께 나아가자고 했다. 그리고 조만간 얼굴을 보면 정말 반가울 것이라고도 했다. 그의 절친한 동료 중 일부가 나와 친분이 있어 유대감 같은 걸 느꼈다. 그들 또한 자살 예방에 힘쓰고 있다.


곧 보자던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2015년 12월 보건복지부와 중앙자살예방센터가 만든 ‘자살 예방-청년 편’ 공익광고에 출연했을 때, 한국형 자살 예방 교육 프로그램 ‘보고 듣고 말하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이 그가 동료들과 함께 개발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떠난 뒤 알게 됐다.

그의 빈소를 찾지 못했다. 조만간 꼭 보자고 약속한 그를 영정 사진으로 볼 자신이 없었다. 또 빈소를 지키며 슬픔을 억누르고 있는 그의 절친한 동료들을 볼 수가 없었다. 장례 기간 그의 절친이자 동료가 퉁퉁 부은 눈으로 간신히 인터뷰하다가 눈물을 터뜨리는 모습을 뉴스로 보면서 동료들이 받았을 충격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만들어 갈 꿈을 가슴속에 키워 갔고, 함께 만나는 날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을 고대했기에 영정 사진으로 그를 마주할 수가 없었다. TV 뉴스로 그의 영결식, 장지로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Today is the best day of my life.”


그가 환자들에게 마지막까지 전하고 싶은 메시지일 수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힘들다는 이유로 인생에서 유일한 ‘오늘’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그는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에서 위기에 빠진 사람들이 죽음 자체를 바라는 게 아니라 고통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으로 자살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희망’과 ‘근거’였다.


삶에서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그를 떠올린다. 그의 말처럼 어떻게든 버티게 해 줄 수 있는 희망과 근거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갑자기 주치의를 잃었던 그의 많은 환자들도 나와 같을 거라 믿는다. 자신을 던져 많은 사람들을 구해내며 생을 마감한 주치의를 떠올리면서 어떻게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의 환자들.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어떤 상황에서든 삶을 놓아선 안 된다는 걸 알 것이다.


이타심을 넘어 숭고한 정신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의 마지막 순간은, 어떻게든 살아보라고 말을 건넨다. 그의 마지막 순간은 너무 아프지만, 치열하고 아름답게 살다 간 삶의 자화상이다.

-(끝)-

고 임세원 교수님께서 쓰신 책. “교수님, 뵙고 싶습니다. 편히 쉬세요.”

◆일러두기

- 이 글의 일부는 2023년 6월 출간한 『3,923일의 생존 기록』(김지수 지음, 도서출판 담다)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 고 임세원 교수님의 마지막 순간은 『처음 만나는 정신과 의사』(백종우 지음, 경희대학교 출판문화원)에서 인용했습니다.

https://youtube.com/shorts/YP1ysLw_YxA?si=0SyOXzxrRffxMODa

https://youtu.be/UVi8oMw9Er0?si=yaMN34yxGgqWQ9Dq

https://youtube.com/shorts/BwCTyBmnHX4?si=Od021xBFWiBbMgQ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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