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과 당사자들만이 아는 비밀을 이실직고할 때가 있다. 절박한 상황에서다. 죽음이 임박했다고 느낄 때 불편한 사실임에도 가감 없이 토해내기도 한다.
2018년 봄, 경기도의 한 대학병원. 입원 환자들이 병원 뜰을 정복했다. 꽃구경이 한창이다. 끌고 다니는 폴대에 링거와 소변줄, 혈액 주머니가 달렸어도 봄은 봄이다.
들뜬 마음은 잠시, 다시 무거워진다. 신경질환을 취재할 때 예민하다. 이날은 병동에서 환자와 보호자를 만난다. 어느 병이든 저마다 사연이 있지만, 뇌‧척수‧신경에 문제가 생기는 신경질환에는 없었던 사연도 쉽게 만들어지는 것 같다. 마비, 언어장애 같은 증상들을 환자들이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신경과 병동은 호스피스 병동 다음으로 가기 두려운 곳이었다. 심약한 모습을 감추고 기자 노릇을 했던 나로서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4월 11일 세계 파킨슨병의 날을 며칠 앞둔 이날 기획 취재로 병원을 찾았다. 파킨슨병 관련 학회의 한 임원이 이곳에 근무한다. 신경과 교수였던 A는 우리 취재팀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얼마 전 3상 임상시험까지 마친 새로운 치료제 소식에 들떠 있었다. 시험 결과가 좋다며 국내에 상용화되면 건강보험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그의 이야기에 호응해 주면서도 내 신경은 병동에 쏠렸다. 소개해 준다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파킨슨병 -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을 분비하는 도파민 신경세포의 감소로 인해 운동장애가 발생하는 퇴행성 뇌 질환.
A교수는 자신의 논문이 국제학술지에 게재됐다며 논문 한글판을 내 손에 쥐어준다. 그 의미를 잘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학술지에 논문이 실린다는 건 의학계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파킨슨병의 날에 보도할 수 있도록 검토하겠다고 했다. 밀린 숙제를 다 했다는 듯 그의 표정이 홀가분하다.
나도 그에게 내준 숙제를 체크했다.
“교수님, 환자분이 1인실에 있다고요? 기본적인 내용은 파악했어요. 가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면 될 거 같아요. ”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환자가 소리를 질러서 다인실에 있을 수가 없어요. 보호자들이 항의해서요.”
“말씀을 잘 못한다고 들었는데, 소리를 지른다고요?”
“네. 자주 울어요. 거의 울부짖죠. 안쓰러워요.”
‘울부짖는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본 말기 환자가 떠올랐다. 부지깽이처럼 마른 노년의 여자가 딸 머리채를 잡고 울었다. 감정이 격해질수록 잡은 머리채를 흔들어댔다. 그 장면을 목격하고 후유증 같은 게 생겼다. 만나는 환자의 병이 깊으면 두려워졌다. 환자의 슬픔을 마주하는 게 자신 없었다. 이번에도 환자가 울부짖는다고 한다. 왜 이런 취재를 밀어붙였는지 후회한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A교수는 병동으로 가자며 앞장섰다. 이동하는 내내 환자에 관해 설명했다. 50대 남성으로 병이 생긴 지 5년째, 약물 치료와 운동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고 했다. 환자의 상태는 갑자기 악화했다. 손 떨림과 행동이 둔해진 거 말고 눈에 띄는 증상은 없었는데, 최근에 자세가 비뚤어지고 보행이 힘들어졌다. 걸을 때 구부정해지고 자주 고꾸라지는 이 병 특유의 증상도 나타났다. 말도 어눌해지고 기억력도 나빠졌고 감정 기복이 커졌다.
신경과 병동이다. 불편한 걸음걸이로 오가는 환자들, 보호자의 부축을 받으며 걷고 있는 환자들이 보였다. 우리는 이들을 지나쳐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보호자인 아내는 남편의 굳어가는 다리 한쪽을 들어 운동시키고 있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가 우리를 보더니 아내에게 뭐라 한다.
“어!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버님.”
아내는 밝았고 환자는 깔끔했다. 오래 입원해 있는 환자에게 맡을 수 있는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이불로 다리를 덮는다면 경증의 내과 환자와 다르지 않다. 아내가 극진하게 보살핀 흔적이다.
나는 환자 곁으로 가서 구부린 채 말했다.
“바깥에 꽃이 예쁘게 폈어요. 제가 선생님 드리려고 슬쩍 꺾었어요. 비밀이에요. 근데 큰일이에요. 교수님이 옆에 계시네요. 병원에 이르실 거 같아요.”
다들 웃는다. 그도 웃었다. 대여섯 송이의 벚꽃이 달린 가지를 그의 손에 쥐어줬다. 뻣뻣한 손은 따뜻했다.
“선생님, 사모님께서 운동해 주셔서 시원하시죠?”
“흐…”
“저희가 선생님 얼굴은 촬영 안 하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병상 주변만 찍을게요. 저희 믿어주셔야 해요.”
“흐…”
환자가 끄덕였다. 영상취재기자는 환자 일상을 카메라로 담기 바빴다. 병상 옆 처치대에 놓인 기구들, 약품들. 휠체어와 폴대에 걸린 수액까지. 교수는 자신의 주력 질환을 취재하는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다른 일정이 있다며 나갔다.
나는 사전 인터뷰를 하려고 보호자를 데리고 나왔다. 우리는 병실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휴대전화에 저장된 남편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 속 남편은 다부진 몸을 가진 중년 남성이었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뛰어갔다. 남편이 울기 시작했다. 후배들은 문 뒤에 서 있었다. 그가 흐느끼며 말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내가 남편을 달랬다.
“어제 내가 전화했잖아. 일이 있어서 지방에 있다고 당신한테 말했잖아. 그 사람 서울 오면 다시 전화할게. 응? 울지 마. 여기 기자님도 계시고. 자기같이 아픈 사람들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받도록 하려고 도와주시려고 오신 거잖아. 울지 마. 응?”
남자가 소리 지른다. 누군가를 찾는 것 같다. 아내는 계속 그를 달랜다.
“울면 교수님한테 내가 혼나. 나 혼나는 거 싫지? 그렇지? 자기가 안 울고 기다려야 만날 수 있잖아. 그 사람이 온대잖아. 응? 뭐라고? 뭐? 뭐?”
“흐…”
“지금 전화해도 못 받아. 그 사람 바쁜 거 자기가 잘 알지? 그렇지? 그 사람도 자기 생각하고 있어. 알잖아. 그렇지? 착한 우리 자기. 울지 마. 울면 힘 빠져요.”
“흐…”
“오늘따라 왜 그럴까. 이렇게 보채면 안 와요. 온다고 했잖아요. 내가 문자도 보여줬는데, 또 보여줄까? 이것 봐봐. 온대잖아. 지방에 있대. 우리 자기가 약도 잘 먹고 운동도 잘하고 그런 다음 만나야지? 머리도 새로 잘라서 자기 깔끔하잖아. 아까 저 기자님이 자기 젠틀하다고 했어.”
“흐…”
‘뭘까? 그 사람? 누굴 기다린다는 건데. 호칭이 그 사람이다. 가족이 아니라는 건데. 누굴 기다린다는 거야? 울면서까지.’
그가 소리 지른다. 간호사가 뛰어온다.
“아버님, 울지 마세요. 잘 지내시다가 왜 또 우세요. 우시면 저희가 교수님한테 혼나요. 여태 잘 지내셨는데, 왜 그러시나.”
간호사가 수액에 뭔가를 주입한다. 수면을 유도하는 약품일 것이다. 간호사는 아내한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고 나갔다.
병실 밖으로 나왔다. 남편이 아직도 소리 지른다. 뭉개진 발음들이 허공에 뿌려지지만, 두 개의 음절에 힘이 느껴졌다. 두 음절이 반복적으로 들린다. 이름이었다. 그는 이름을 계속 부르는 것이다. 누군가 남편이 말하는 ‘그 사람’이 돼 답해야 호명이 멈출 것 같다.
‘이름을 부르는 게 왜 이리 슬프게 느껴질까. 그건 대답이 없어서겠지.’
남자가, 젊지 않은 남자가 울면, 그것도 소리 내 울면, 슬픔은 커진다.
멍하게 서 있는 내게 말을 건다. 아내였다.
“죄송해요. 남편이 잠들었어요. 저런 사람이 아닌데, 이 병이 성격까지 다 바꿔버리네요.”
“저희가 죄송하죠.”
아내가 운다. 손수건이다. 한때 나한테도 손수건은 신체의 일부였다. 그녀에게도 그런 것 같다. 이곳저곳 얼룩이다. 저건 빨아도 지지 않는 얼룩. 그녀의 피눈물 자국이다.
눈물은 경계를 허문다. 나는 그녀를 안았다. 그녀를 위로하기보다 내가 무너질까 두려워 껴안았다.
‘울면 안 돼.’
개인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의료 기자에 도전했는데, 한계를 느낄 때마다 후회한다.
“기자님, 궁금하시죠. 저 사람이 누굴 찾는지.”
“괜찮아요. 말씀 안 해주셔도 돼요.”
“그 사람은, 저 사람이 사랑하는 여자예요.”
“…”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면, 아내 아닌가? 내 머릿속은 이랬다. 아내가 앞에 있는데. 이게 뭔 소리야? 이 상황을 이해하는데 몇 초 더 필요했다. 병이 깊은 남편은 내연녀를 그리워하며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어머님,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질문 자체가 ‘우문’이다. 어찌 괜찮겠는가. 그녀의 마음은 갈가리 찢겨 형태조차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이 부재중일 것이다. 마음 실종이다.
얼마나 남편을 사랑하면 저럴 수 있을까. 아니다. 사랑을 뛰어넘은 숭고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영역 같다. 병든 남편이 내연녀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비극적인 상황에서조차 아내로서 역할을 할 뿐이다. 그녀는 비극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으며 삶을 지켜내고 있었다.
“만약 남편이 아프지 않았다면, 그를 용서하지 않았을 거예요. 곁을 떠나고도 남았죠. 저 아니면 남편을 돌볼 사람이 없어요. 남편이 병들었다고 버릴 수는 없잖아요. 끝까지 돌보려고요.”
그녀는 병실로 향했다. 병실 미닫이문을 조심스럽게 여는 몸짓에서 나비를 봤다. 훨훨 날고 싶은 나비.
집으로 돌아가면 그녀는 온종일 간병이다. 밥을 먹여주고 움직일 때마다 수족이 되어야 하고 남편의 눈물을 닦아주고 달랠 것이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내연녀의 이름을 수없이 들을 것이다.
남편이 낼 수 있는 소리는 두 가지였다. 긍정의 대답을 의미하는 ‘흐…’ 그리고 내연녀의 이름. 그 이름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내뿐이다.
그가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번만이라도 하길 바랐으나 그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배신한 남편이 가장 연약한 상황에 놓였음에도 버리지 않고 곁을 지키는 그녀이기에.
인간은 약하고 얕으며 흔들리기 쉬운 존재이기도 하지만, 존엄을 지켜내는 이들을 볼 때면 더없이 강하고 깊으며 단단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속성을 이 부부는 보여줬다.
그녀는 내게 숙제를 내줬다.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인지, 비극적인 상황에서 삶을 지켜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생각하고 살아가라는 것.
그녀를 잊고 있다가도 병원에 가서 중년 부부를 볼 때면 떠오른다.
지금쯤 나비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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