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영웅] 정태
'누나야, 저기 맛집이가'
영화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영화관 앞에 앉아 맞은편 패밀리레스토랑에 줄지어 서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동생이 물었다.
'그냥 뭐 뷔페 같은 패밀리레스토랑인데 맛있겠지, 누나야가 다음에 사줄게'
친구들은 이런 것도 먹어보고 저런 것도 먹어봤다는데 자기가 가본 맛집이라곤 울타리 없는 만두집, 맥도널드, 마트 푸드코트뿐이라며 엉엉 울던 꼬마 동생이 키는 나보다 한참을 커서도 다음에 사주겠다니 설레이는 듯한 눈으로 끄덕였다.
2019년 10월.
'내가 누구 만큼만 됐으면 우리 영웅이 크게 됬을낀데'
자연산 모둠회 한 접시와 밑반찬들이 각기 올라가 있는 세 개의 좌식테이블 끝으로 고모네 두 식구가 앉아있고 반대편 끝에 정태옆으로 남편이 앉았다. 정태는 사위가 채워준 꽉 찬 소주잔을 들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감기기운이 있어 동생의 결혼식 내내 찡얼거리던 아이들 앞으로 미지근한 물을 내어주고 평소에 안 보여주던 만화영화들을 잔뜩 보여줘 가며 다독이다 맞은편에 앉아 전 법무부장관 이름을 들먹이며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정태에게
'그런 아빠 안 해줘도 되니까 일이나 좀 열심히 다니시지 그랬어!'
이 말이 목젖을 쳤지만 미지근한 물과 함께 삼켰다.
결혼식에 절대 참석하지 않겠다며 엄포를 놓더니 꾸역꾸역 달래 가며 사줬던 양복을 입고 신랑 혼주석에 앉아있던 정태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입꼬리가 내려간 적이 없었다.
경주 유명한 밀면집 앞에서 몇 달 전 정태를 만났을 때 청색작업복이 한참 헐렁할 만큼 야위여 있었다.
묻고 싶은 말들이 정열 없이 떠올랐지만 모두 삼킨 채 큰소리로 인사만 뱉었다.
유명한 밀면집을 앞에 두고 처음 보는 예비며느리가 이뻤는지 정태는 맞은편 소고기 집에 가자고 했다.
소고기를 먹으면서도 정태는 소주를 주문하지 않았다.
'어지간히 안 좋은가 그 좋아하는 술도 안 먹고 소주회사 이제 다 망하겠네' 철없는 궁금함도 고기와 함께 삼켰다.
고기가 점점 줄어들자 정태는 지갑에서 돈뭉치를 꺼내어 동생에게 건네며 말했다.
'결혼식에서 내 볼 생각 하지마레이. 나는 안 간다. 상견례도 안 가니까. 그래 알아라'
어디서도 대답하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정태를 바라보는 시선들에서 많은 생각이 들렸다.
고기가 모자랄까 고깃집 주인을 부르다 돌아보며 많이 먹으라 말하는 정태의 목소리는 끝내 단단했다.
'바나나 우유 하나만 사다주소'
시술을 마치고 회복하는 다인실 병실
그 간 옆구리가 아프고 살이 빠져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어차피 내 병은 내가 제일 잘 안다. 아버지도 누나도 형도 그렇게 보냈으니까.
병원에 가서 추잡한 모습만 보이다 가느니 이래 있다 갈란다.
그저 내 차례가 되었다. 겁먹지 말자. 이렇게 살다 가는 거다. 혼자서 떠나는 거다.
딸도 아들도 연락하지 않을 거다.
상견례는 잘했는지 모르겠다. 알아서들 잘하겠지. 그래왔듯 잘 살겠지.
음식물을 먹기 힘들고 어지러움이 극심해지고서야 정태는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고심했던 병명은 아니었고 시술로 호전된다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 관리하지 않고 현재 생활습관을 이어 나가면
그 병에도 주의 깊은 단계는 맞다고 했다.
침대 옆 선반에서 지갑을 쥐어 펼치고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간병인에게 내밀었다.
'바나나 우유하고 좀 사다주소, 남는 거는 하소'
달콤한 바나나우유랑 빵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 만원 줬으니 이것저것 사 오겠지.
정태는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건 바나나우유 딱 하나였다.
'어예 그랄수가 있노 만원 줬으면 바나나우유하고 뭐 다른 간식도 사 올 줄 알았지'
결혼식 뒤풀이에서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사위가 주는 술잔을 다시 들고 이야기하는 정태
'소주 회사 망할 줄 알았더구먼 다시 호황이네, 다음부턴 부탁할 때 이것도 사 오고 이것도 사달라고 정확히 말해!'라고 말하며 얼굴도 모르는 그 간병인이 얄밉고 얄미운 마음을 숨긴 채
물건은 그렇게도 잘 부수더니 정작 넘겨줘야 될 짐은 나눠주지 않으려 하는 정태를 더 밉고 미워했다.
'야 어릴 때 야하고 같이 어디 가다가 어묵이 얼마나 맛있어 보이는지 하나 먹고 싶었는데 주머니에 돈이 없는 거라 니 하나 몰래 하니까 먹는다 카데 그래가 야만 하나 사주고 나는 못 묵었는데 참 얼마나 먹고 싶든지 참 내가 야를 그래 키았다'
'맨날 물건 부수고 욕하고 이런 건 생각도 못하고 그러게 그 좋은 기술로 일이나 좀 성실히 나가지 그래서 나는 계속 일하는 거야! 우리 애들 맛있는 거 실컷 사주려고'
뱉지 못할 반항심 가득한 생각들만 정태 앞에 앉아 꾸역꾸역 해대면서도 사위 옆에 앉아 웃어대는 정태 곁을 아이들이 아무리 찡얼거려도 떠날 수 없었다.
끊임없이 숨기고 철없이 덮어버리는 마음으로
여전히 슬픔이 슬픔 다워질 수 없을까 봐
그 계절은 기회를 내밀었고
우리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정태 하면 생각나는 거 두서없이 말해봐라'
동생에게 던졌다.
'왕 손짜장'
정태 차를 타고 엄마 없이 할머니 댁에 따라가는 사람은 조수석에 앉을 수 있었고 가는 길목 경주쯤 어딘가에서 왕 손짜장을 먹을 수 있었다. 이름 그대로 고기와 감자, 야채들이 큼직하게 썰어져 들어가 있고 면의 굵기가 제각각인 수타면이 그리 맛있는지는 몰랐지만 특별했다.
'촌에 갈 때 만날 두 부 사 가고'
'노래 희한한 거 부르고'
'할아버지 제사 때 못 가서 술 먹고 울던 거'
동생이 읊었다.
'땅속에서 할아버지가 더 우셨을 듯'
내가 말했다.
'어릴 때 맥도널드가서 해피밀 세트 사준 거도 기억나긴 하네 누나야는 불고기 버거 세트 먹고'
'니만 사주고 오다가 딱 들켜서 먹고 오라고 나한테 돈을 줬는데 해피밀 세트라는 게 있는 줄 몰라서 내 돈 100원 보태 제일 가격 비슷한 불고기 버거 세트 먹고 온 거임'
'촌에 따라가서 같이 호두 따러 간 거, 모자 이상한 거 쓰고 맨발에 운동화 꺾어 신고 장대 하나 들고 앞서 가는데 개구쟁이 같더라. 군대에 있을 때 전화로 벤츠 S클래스 타고 온다 하고 수동 은색마티즈 타고 왔었지 한 세 번 왔나 면회외박. 삼겹살 먹고 치킨 먹고 술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하고. 권위적으로 후임들 대하지 마라 하더라 이 말은 휴가 때 들음'
'아빠랑 두 달 정도 같이 집 짓는 일 한 것도 있네, 명촌 쪽에서, 집은 아니고 슬레이트 2층 건물, 아침부터 막걸리 마시고 점심때 술 마시고 퇴근해서 술을 또 먹더라, 옆에서 술먹이는 아저씨들이 얼마나 얄밉던지'
동생은 계속해서 이어 말했다.
'누나야 결혼하기 전주 추석에 이모들하고 해서 누나야가 부산에 방 잡아 줬잖아. 그때 나 아빠랑 할머니집 갔는데 사촌형이랑 큰 고모부 오셔가지고 소고기 먹는데, 자꾸 쓸 때 없는 말 하길래 새벽에 청송역까지 걸어서 택시 타고 영천 갔다가 부산 간 거 생각나네'
'그때 청송역까지 걸어갔나. 얼마나 걸었는데'
'별로 안멈, 한 한 시간 안 걸은 듯 촌이라서 가로등이 없어가'
'길은 어떻게 찾음?'
'그냥 이전에 차 타고 온 길 반대로 걸었지'
'그럼 역에 갔다가 기차 없어서 택시 타고 영천으로 간 거가?'
'글치 114 전화해서 번로 찾아가 갔지'
'걸으면서 분노에 가득 찾겠네'
'아니 그냥. 뭐가 잘못된 건지 계속 생각했지. 걷는 것보다 사는 게 더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렇군'
'그때 내가 뭘 알았겠노, 공황장애가 어릴 때부터 만들어졌는데 항상 두려움에 사는 그런 것, 안 그런 척하는 거지'
'충분히 알았을 수도 있다'
'장인어른이랑 셋이서 술 엄청 먹었던 거 그때 인당 소주 다섯 병은 먹은 듯
'그날 술 엄청 취해서 같이 사진도 찍었는데'
보내주는 사진 속 오른쪽엔 활짝 웃고 있는 동생 얼굴이 왼쪽엔 모자 하나를 삐뚤게 쓰고 게슴츠레한 눈에 입을 꾹 다물고 입꼬리를 아래로 쭉 내려 장난기 가득한 정태얼굴이 있다.
어느 주말 집 근처 시장을 서성이다 보면 반쯤 비워진 막걸리 한 병과 가득 채워진 막걸리 잔 김 나는 어묵들 앞에 앉아있는 정태가 있다.
장난감을 들고서 할아버지를 부르는 아이들 옆에 가만히 서서 지갑을 열고 지폐를 문질러 가며 잡고 있는 정태가 있다.
술에 취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욕지거리를 내뱉는 정태가 있다.
실없는 말을 뱉으며 재밌어하는 정태가 있다.
목소리를 꾹 눌러 요상하게 만들고는 바위섬 노래를 부르는 정태가 있다.
신발을 꺾어 신은채 어그적 한 손으로 뒷머리를 아래로 정돈하며 앞장서 걸어가는 정태가 있다.
운전석 창문에 왼팔을 걸치곤 밖을 내다보고 담배를 태우는 정태가 있다.
그냥 정태
정태가 있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곳에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아무도 없지만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 배창희 [바위섬]
바위섬 어느 구석 어느 한켠에
정태가 머물러 있다.
정태의 어느 한켠 어느 구석에
머물러있는 바위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