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영웅] 정태
'이거 비싼 커피제'
2012년 가을, 며칠 전부터 정태가 친척어르신들 계신 영해에 벌초하러 가는데 바람 쐴 겸 같이 가자고 했다.
막상 도착하니 정태는 올해 유난히 여름티를 못 벗는 가을더위에 이틀은 걸쳐 벌초를 해야 될 것 같다고 했다.
'아니 저녁에 집에 간다고 했는데 여기서 어떻게 자고 가, 나는 집에 갈래!'
온갖 짜증을 내며 나는 갈 테니 버스정류장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상사에게 평일 내내 시달리고 주말이 주말 같지도 않게 힘들었던 날들,
잠이라도 편히 집에서 자겠다는 핑계로 짜증을 내버렸고
결국 정태와 나란히 시골의 시외버스정류장에 앉았다.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표를 끊고
터미널에 붙은 작은 슈퍼에 들러 커피하나를 사 정태의 손에 쥐어주며
자꾸만 올라오는 미안함을 모르는 척하려 애썼다.
버스는 정류장에서 출입문을 연채 출발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 앞자리에 앉은 나를 보고도 출입문 앞에 가만히 서있는 정태
기사가 그런 정태를 지나쳐 출입문을 오르고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이거 비싼 커피제'
미소 띠어 웃으며 묻는 정태
슈퍼에서 파는 커피가 비싸봤자 뭐 얼마나 비싸다고
오자마자 집에 간다는데 화도 안 나는지
뚜껑 돌려여는거라 비싼 거냐고 묻는 정태
'얼만데 이거 비싸제'
고작 그 커피가 뭐가 그리 소중하다고 닦아가며 묻는지
'몰라!'
퉁명스럽게 말하곤
'또 사줄게'
했다.
정태 혼자 사는 집, 파란색 마티즈가 생기고야 동생을 태워 처음 가봤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어가며 도착한 곳에는 담이 없이 커다란 대문만 덩그러니 있었다.
담은 없었지만 대문 양 옆으로 수풀이 무성해 그 길을 이용해 집안으로 들어가기엔 어려워 보였다.
대문을 들어섰을 때 낮은 회색 계단과 굵은 회색 기둥 두 개가 나열된 현관을 가진 옛날식 붉은 벽돌이 올라간 주택이 보였다.
대문 안은 조용했다.
제대로 찾아온 게 맞나 싶어 정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왼쪽으로 해서 안으로 들어온나'
다시 대문을 너머 주택을 지나치며 왼쪽으로 들어가자
풀이 무성한 공터 뒤로 1층 낮은 시멘트 집이 보였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작은 건물 왼쪽으로
'우리셋 모두 저 작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은 파란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조그만 나무문이 보였다.
작은 건물은 그마저도 두 집 살림이 가능하게 녹색 페인트가 벗겨진 문이 있는 이웃집이 있었다.
파란색 색 바랜 방문 앞의 고리에는 작은 자물쇠 하나가 열린 채로 걸려 있었다.
'앞에 주택은 뭐야'
자물쇠 열린 문 앞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정태에게 물었다.
'주인집'
정태가 대답했다.
'가자, 시장 가서 고기 사 오자'
정태가 말했다.
우리는 그렇다 할 인사도 없이 따라 걸었다.
차로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한 블록 내려가니 시장이 있었다.
요일장이 열리는 장터는 장이 없는 날이라 한산했다.
조용한 시장 안으로 난전을 치고 나물을 파는 할머니들과 군데군데 불켜진 상점이 보였다.
정태가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는 동안 나에게 상추와 깻잎을 각각 500원어치만 사 오라고 했지만
천 원이라고 적힌 바구니들 앞에서 그냥 각각 천 원씩 사버렸다.
검은 봉투에 담기는 상추와 깻잎의 양을 보고서야 정태가 왜 500원어치만 사 오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걸 누가 다 먹는다고 이따 가져가라'
정태가 말했다.
다시 정태를 따라 시멘트 집으로 향했다.
파란 페인트가 벗겨져가는 나무 문을 열자 부엌부터 나왔다.
조그만 싱크대 하나와 낮은 냉장고가 나란히 있었다.
냉장고의 냉동실 문 앞으로는 구조상 시멘트가 덫발라져 냉동실 문을 활짝 열기란 어려워 보였다.
싱크대 맞은편 벽, 수도꼭지에 연결된 고무호스 아래로 있는 동그란 바가지,
그 옆으로 신발을 벗고 또 다른 작은 문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냉장고가 하나 더 보였고 그 위로 일회용 노란색 믹스커피 한 상자와 전기포트, 종이컵이 보였다.
김치를 꺼내려 연 방 안의 냉장고에는 가지런한 밑반찬들이 반찬통 여러 개에 가득 담겨 있었다.
낮은 시멘트 집에서 낮게 다가오는 자책감을 고맙게도 누가 넣어뒀는지는 물어볼 수 없었던 가지런히 있는 밑반찬에 묻어보려 애썼다.
동생과 나는 상추와 깻잎을 씻고
정태는 버너에 불을 올려 고기를 구웠다.
'밥물래'
방한켠에 놓인 전기밥솥을 여는 정태 옆으로 올라오는 하얀 김 아래로 갓 지은 새 밥이 보였다.
그 좁은 방 안에서 구워 먹는 삼겹살과
시골에서 가져왔다는 김치가 얼마나 맛있는지 셋이서 쉼 없이 다 먹었다.
가득 차는 고기냄새로 낯선 곳에 있는 낯설지 않은 정태와의 어색함, 알 수 없는 자책감, 미련과 미안함 사이의 그 어떤 마음도 묻혀버리려 애썼다.
'너거 엄마 줘라'
상추를 보며 정태가 말했다.
'커피 한잔 하자'
전기포트 옆에 있던 생수를 포트에 부으며 정태가 또 말했다.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과 남은 상추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앞장서는 정태를 따라 작은 문 너머 밖으로 나왔다.
들어갈 땐 보이지 않았던 나란히 가꾸어진 텃밭이 보였다.
아직 영글진 않았지만 어린 땡초, 가지, 깻잎, 방울토마토, 호박들이 튼튼한 대들 과 함께 빨간 노끈을 얇게 찢어 꼼꼼히 묶여 벌써 잘 자랄 듯 보였다.
어디서 났는지 바나나 나무라며 너무 잘 자라서 잘라내도 또 옆으로 새 나무가 나고 옆으로 옮겨 난다고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태우며 재밌다는 듯 정태는 말했다.
지금 나의 딸만큼은 자랐을까. 정태와 둘만 있던 어느 주말 낮.
정태는 대낮부터 소주를 들이키며 나를 불러다 주절주절 물었다.
'내가 혼자 살았으면 이래 일도 안 해도 되고, 집도 필요 없고, 옷도 대충 걸치고, 대충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놀고, 돈 떨어지면 다시 쪼매 일하다가 또 놀고 훨훨 날아 자유롭게 다닐낀데, 맞다 아이가. 어예 생각하노'
'혼자 그렇게 살면 의미가 없지. 자식이 있고 가족이 있고 맛있는 것도 함께 먹고 웃고 이야기하고, 혼자 그렇게 살면 편하긴 하겠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지!'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의 논리로 반박했다.
'그렇나, 그 말도 맞나'
정태는 생각 많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소주를 삼켰다.
어린잎들이 있는 텃밭을 향해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태우는 정태의 뒷모습과 그 너머로 강렬한 붉은빛을 내며 넘어가는 서쪽 해를 바라보며 작고 낮은 시멘트집을 등진채 그날을 떠올렸다.
정태. 그때 말한 정태의 자유는 이런 것이었을까.
재밌다는 듯 바나나나무 이야기를 하는 정태는 입은 웃고 눈은 붉어 있었다.
슬픔이 슬픔인 줄 알게 되어도 우리는 소리 없이 웃었고
믹스커피 한잔을 다 비우지 못했다.
2015년 크리스마스이브.
한 달 전 돌잔치를 끝낸 딸을 안고 정태와 함께 울산 앞바다가 보이는 체인점 커피숍에 들어섰다.
그 해의 크리스마스이브는 평일이라 그런지 낮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1층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2층으로 올라가자 중앙의 커다란 트리가 시선을 뺏었다.
붉은색 금색 오너먼트들이 둘러져 있고 작은 알전구들이 반짝이는 트리를 보며
바다가 제일 잘 보이는 창가의 푹신한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숫자가 적힌 동그란 알림 벨의 진동이 울리자 정태와 딸을 둔 채 1층으로 내려가
주문한 커피와 케이크를 받아 들고 다시 2층으로 올라왔다.
정태 앞에 시럽을 두 번 돌려 넣은 따뜻한 라테 한잔을 놓아주고는
전화기를 꺼내어 딸을 찍는 척 열심히 정태를 찍었다.
'머가 이래 양이 많노'
커다랗고 하얀 머그잔을 들며 정태는
더 이상 비싼 커피를 묻지 않았지만
양 많다던 커피를 다 비웠고
나는 여전히
'또 사줄게'
했다.
또 사주겠다는 어느 날의 마지막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날의 사진을 다시 꺼내었다.
활짝 웃고 있는 정태.
그 시선을 따라가면
정태를 보며 없는 머리숱에 작은 삔 하나를 꽂고는
같이 활짝 웃고 있는 나의 딸이 보인다.
사진 속의 정태가 청색작업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것도 그제야 보인다.
입도 웃고 눈도 웃는 정태가 그제야 보인다.
정태의 시간은 어느 속에서 자유로웠을까.
어느 시간 속에서 정태는 자유로웠을까.
'또 사줄게'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