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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Oct 29. 2022

나는 틀리지 않았다.

드로잉 저널을 쓰기까지


중년이 되자 익숙한 일상에서 미치도록 벗어나고 싶어 괴로운 때가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내가 원하는 삶이 맞나? 나답게 산다는 게 뭐지? 이렇게 살다가 죽어도 괜찮은 인생인가?'

웬만큼 순조롭게 살아왔다 싶었는데 거기엔 '나'라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삶 전체가 흔들렸습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후회만 하다 죽지는 말자며 휴직을 결심했습니다.

재작년 12월 휴직 신청 마감날,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신청서를 만지작거렸습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어쩌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홀로 서성이며 심호흡했습니다. 온전히 나를 위해 쉬어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이게 무슨 번지 점프 도전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다 결국 휴직서를 도로 서랍에 넣고 말았습니다. 여태 주말부부에 독박 육아하며 더한 상황에서도 잘 참고 이겨냈는데 고작 나만의 여유를 즐겨보겠다고 휴직이라니... 다시 정신 줄 잡고 이겨내 보자며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일 년 내내 그 순간을 원망하며 보냈습니다. 자신에게 휴식조차 선물하지 않으려 하는 나에게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휴직하면 쓸 돈을 매달 적금 부으며 다짐했습니다. "이번엔 꼭 휴직하자! 너 이러다 쓰러져! 병원 순회하는 바보 되지 말고 신나게 노는 미친놈이 되자."


무려 재수 끝에 무급 휴직자가 되었습니다.

휴직하는 동안 능력 탓하며 용기도 없고 배짱은 더 없어 외면했던 일들을 하나씩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음치라는 천추의 한을 풀고 싶어 제일 먼저 아이가 다니는 음악 학원에 보컬 수업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에세이를 출판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화실과 '100일 블로그 글쓰기 프로그램'을 등록했습니다. 처음에는 남들 헐레벌떡 출근할 시간에 여유롭게 요가를 다니고, 식곤증과 싸우며 사무실 모니터 볼 시간에 커피 홀짝이며 글 쓸 수 있는 전망 좋은 카페를 찾아다니니 세상 부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여기가 '하와이' 같았습니다.


4개월쯤 지나자, 꿈꾸던 생활도 별일 없는 일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내 목소리가 악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이 벅차올랐던 보컬 수업도 더는 부르고 싶은 노래가 없어져 그만두었고, 화실도 남의 그림을 모방하는 수업방식에 재미를 못 붙여 결국 혼자 연습하기로 결심하고 접었습니다.


그러나 글쓰기만큼은 어렵사리 얻은 휴직을 제 손으로 무용지물로 만들면서까지 끝내 버리지 못했습니다. 아침 6시 단톡방으로 공지되는 글쓰기 주제를 받아 들고 온종일 썼다 지웠다 고치기를 반복하다 보니, 12시 정각을 앞에 두고 절절매는 희한한 일상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내 생애 두 번 다시는 글쓰기 인증 미션을 하지 않겠노라고 치를 떨어놓고는 매몰비용에 집착한 나머지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습니다.


브런치 작가가 된 기쁨도 잠시, 또다시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이 방법 저 방법 찾아보며 헤매고 조회수 통계에 무너지는 그런 일상을 되풀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도대체 휴직 기간 왜 이런 삶을 사는 걸까? 제대로 쉬지 못하는 나에 대해 안타까움과 미련함이 마구 밀려왔습니다. 글과 그림 실력을 키우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임을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무모한 어리석음을 탓해야 할까?


바로 그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바로 '드로잉 저널' 그림일기입니다.

그동안 글과 그림이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잘 쓰고 잘 그리고 싶은 욕심이 너무 지나쳐서 늘 남들의 시선과 기준에 주눅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늘 시선이 밖으로만 향해 있었고, 그러는 동안 나 자신은 어딘가 늘 부족하고 모자라서 채워 넣어야 할 열등한 존재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이제 내가 주인공인 그림을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과 날 것의 느낌을 그대로 적으면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내가 선택하며 살아온 삶은 틀리지 않았으며, 그리고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심판자는 바로 '나'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글도 그림도 다 내 안에서 나와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오늘 만난 인연들을 천천히 그려봅니다.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도 함께 몽글몽글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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