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목표는 삶을 헤쳐나가는 동안 자신이 가진 모든 가능성에 다가가며 역동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완전한 존재에 이르는 길은 치유나 깨우침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감당하고 삶의 변화에 창의적으로 탄력 있게 대응하는 것이다. 삶의 다양한 면면에 귀를 기울일 때, 삶이 더 흥미진진해진다.
-로버트 존슨, 제리 룰,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중에서
나는 지금 어려움에 봉착했다. 어떤 한 곳에 점을 찍지 못하고 생각이 방황 중이다. 잠재력과 가능성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는데 먹먹한 귀가 나를 괴롭힌다. 혼자 귀를 파보기도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비인후과에 가보려 했지만 아직 어린 셋째를 본다는 이유로 가보지도 못하고 몇 주째 고생 중이다. 물이 귀에 들어간 건지 귀지가 꽉 찬 건지 내 힘으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얼른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먹먹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단 몇 초면 시원한 세상을 맞이하게 될 텐데 무엇 때문에 이리도 힘들게 놔두는 것인지. 불편한 걸 알면서도 그 상태 그대로 가만히 있는 나는 뭘까. 불편함이 익숙해지려는 것인지, 머리로는 익숙함을 탈피해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마음으로는 움직여지지 않는 걸까.
익숙함이 익숙함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 같아도 벗어나려고 나름 애를 쓰고 있다. 남편이 출근하는 것을 보지 못할 정도로 늦잠을 자지 않기 위해 아이들과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 보기로 했다. 처음엔 거의 아침이 다되어 일어났는데 신기하게도 몸이 익숙해졌는지 지금은 4시쯤만 되면 눈이 떠진다. 아이의 뒤척임에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있지만, 마음가짐이 예전과는 달라졌다. 나의 브런치 작가명인 '이작가' 때문인 것인지, 글을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예전엔 그렇게도 이름을 바꾸고 싶었고 좋은 이름으로 좋은 기운을 받길 원했는데, 지금은 '이작가'라는 활동명이 있어서 정말 작가가 된 기분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프리랜서 전업 작가가 되어 있을 것 같다. 전업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 이 필요할 것이다. 훈련을 위해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라는 사명감이다. 글로 수입이 생기는 단계는 아니어도, 누군가 내 글을 읽고 마음에 좋은 영향을 받는다면 분명 나는 작가임에 틀림이 없다. 실제 작가라 느끼는 순간 나도 몰랐던 잠재력과 가능성이 틔어 나오기 때문이다.
잠재력과 가능성을 살리는 긍정적인 수용
"그 나이 되면 알아들을 줄 알아야지, 이젠 아기처럼 울거나 떼쓰면 안 돼"
"떼쓰면 혼 날줄 알아"
잠재력과 가능성을 무시하는 무시무시한, 폭력적인 말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절대로 아이를 주눅 들게 하지 않고 사랑만 주어야지 결심을 하는데도 어느새 어릴 적 부모님에게 들은 바대로 똑같이 말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 모두가 그렇다. 같은 말의 방식으로 아이들의 마음에 갈기갈기 상처를 입히고 있다. 나는 이제야 그 말들의 상처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고 있고, 진짜 나를 찾아 나가고 있는데, 그 말들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 아이들을 괴롭힌다.
아이들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라고, 부모는 사랑을 줄 때와 주지 않을 때를 구분한다. 부모 나름대로의 생각과 가치관이 있기 때문이어서 일까? 그 속에서 아이는 상처를 받을 수도, 마음이 단단해질 수도 있다. - 나의 경험상 단단해지기보다는 상처가 굳어져 마음이 닫혀 버리는 쪽에 가깝다. -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자녀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이다. 얼마나 아이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건 표현하지 않고는 절대로 아이가 알 수 없다. 사랑한다고, 우주보다 더 사랑한다고 꽉 껴안으며 뽀뽀를 하는 등, 겉으로 표현할 때 아이의 온 우주는 온전해지면서 광대하고 거대한 초원으로 펼쳐질 것이다. 잠재력은 이곳에서 나온다.
출처 : 홍수자 최길수의 긍정에세이
잠재력과 가능성은 상대를 통해서 나온다. 이 세상에 결코 나 혼자가 아니듯 모든 것은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모든 것들이 상대를 통해 존재한다. 연예인에겐 팬이 존재하고 영업인에겐 고객이 존재하듯, 학교에는 학생이 있어 선생님이 있고, 가정에선 자녀가 있기에 부모가 있듯이, 이 세상엔 '너'가 있어 '나'가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이 되고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상대를 통한 배움이 있다. 자신의 고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 삶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주변을 돌아보면 미처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나를 찾을 수 있다. 자신이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을 하게 될 때 알지 못했던 잠재력과 가능성이 뿜어져 나온다.
삶에는 깨달음이 있다. 그것 또한 상대를 통해서 온다. 주고 싶고 위하고 싶은 마음이 사람의 본성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지식이 많아도 혼자서 기쁠 수가 없다. 혼자살 길 선택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월이 흘러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늘 삶의 과제가 되어있는 것을 보면 결코 사람은 혼자서 기쁘고 행복할 수가 없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떠나서 함께이길 바라는 마음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가 없다. 결국 사람은 줌으로써 행복을 느낀다. 음식을 나누고 지식을 나누는 등 내가 가진 것을 나눌 때, 상대에게 인정을 받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마음과 마음이 닿아서 인생의 가치로움을 깨닫는다.
나는 어떤 삶에 닻을 내릴 것인가. 나는 무엇을 선택하고 집중할 것인가. 마흔으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이다. 왜 그렇게 살지 못했는지 땅을 치고 후회해도 시간은 벌써 저만치 가있다. 그렇지만 언제나 내 삶의 가능성은 열려있다. 이것만 명심하자. 온전히 살고자 하는 마음의 수신호를 무시하지 말자.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보자. 무엇을 하든 기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이고 행운이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공허함은 때로 괴물이 되어 나를 잡아먹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고야 만다. 그 괴로움을 알아차리고, 괴로움의 이유를 남이 아닌 나에게서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어딘지 모르는 삶의 방향에 괴로운 마음을 붙안고 있기보다 평소 그려왔던, 생각해 왔던 일들을 모험적으로 실천해 본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더 흥미로울 것이고 역동적일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더 좋은 삶을 위해서 한 번쯤 모험을 해도 괜찮고 도전을 해도 좋다. 마음껏 유영하며 기쁨을 누릴 자격이 모두에게 있다. 충분히도. 내가 머물러있던 곳에서 한 발짝 나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때 가능성과 잠재력은 시동을 걸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이에게는 독자가 존재한다. 독자가 있기에 작가가 존재한다. 우린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 글쓰기에 대한 많은 작가님들의 글 속에서, 글의 방향이 '나'가 아닌 '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일기가 아닌 읽힐 수 있는 글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가 무엇을 갈망하고 필요로 하는지 많은 고민을 하고 정성을 다해 써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글엔 스킬보다 '메시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 또한 상대에게서 온다. 결국 잠재력과 가능성은 상대를 위함으로써 발현되는 것이다. 창조성은 그렇게 우리에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