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펑 울었다. 집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너무 아팠다. 아픔이 슬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아프다. 척추뼈가 10개 골절이 되고 발은 퉁퉁 부어 오른다. 한번 앉으면 일어서기가 중노동이다. 그러니 화장실 한번 가는 것도 중노동이다. 도대체 난 왜 이런 고통 속에 빠졌는가?
인생과 우주를 운행하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첫쌔는 신의 개입이다. 전 우주를 신이 운행하며 그 자녀들을 특별히 보호하신 다는 것이다. 둘째는 인과율에 의한 자연법칙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움직이며 신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세상이 삼층천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믿었다. 이 세상과, 그리 멀지 않은 하늘에 신아 살고 있고, 죽은 자들이 스올로 내려 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이 매우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다. 탑을 쌓으면 하늘에 닿아 신과 싸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성서의 바벨탑 사건이 그것이다. 과학이 진보하면서 지구는 편평하지도 않고 삼층천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주의 범위가 넓어지니 신의 능력과 한계도 더 넓어져야만 했다. 더 이상 신앙을 내던지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신을 점점 확장되는 우주 그 이상의 존재로 확장시켜 왔다. 그리하여 신은 끝없는 우주 만물을 운행하시며 그 밖에서 세상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존재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록 신은 우리에게서 더 멀어지고 저 멀리서 그저 우리를 바라보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기 힘든 존재, 인생 만사는 자연법칙으로 운행되고 신은 그저 질서를 유지하는 존재라면 우리에게 신이 필요한가? 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는 신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 인생의 고통에 개입하지 못하는 신이 있으면 뭣하고 없으면 뭣한단 말인가?
답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저 우리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현실을 살아내야 할 뿐이고, 그때 신이 필요한 자는 신에게 자연법칙을 믿는 자는 과학에게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면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소부재하고 유일무이한 신은 과학의 진보와 함께 디자인된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