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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연 Nov 15. 2023

엄마가 제주도 가고 싶으시대

퇴사 후 가족 여행

팬데믹이 가라앉으면서 슬슬 여행에 대한 열망이 떠올랐다. 우리 가족들은 이미 작년 하반기부터 슬슬 국내 여행을 시작했던 터다. 이동은 자동차로 하고 펜션처럼 완전히 분리된 숙소에서 묵으면 질병이나 사람들과 거리 두기를 하면서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여동생이 작년처럼 올해도 가족 여행을 가자고 의견을 냈다. 어딜 갈까 하는 내 물음에 여동생이 한 대답은,


"엄마가 제주도 가고 싶으시대."


그렇게, 여동생의 말에 의해 가족 여행의 목적지는, 제주도가 되었다. 2023년 초의 일이었다. 마침 여동생이 말을 꺼낸 시점에는 남동생이 제주도민이었다. 제주도민은 도내의 웬만한 관광지 입장료가 무료다. 엄마 역시 노약자로 무료나 할인이 가능해서 여행경비가 절약되는 좋은 기회였다. 무엇보다 각자 여행 갔던 제주도에 온 가족이 함께 간 적은 없었다는 게 이번 여행을 기획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난해 '통영-거제도'를 돌았던 첫 번째 가족 여행에서 즐거운 경험을 했던 것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


2022 즐거웠던 가족여행




가장 먼저, 언제 떠냐는 것이 쟁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봄에 가고 싶었다. 2월 말에 엄마와 여동생은 부산과 대구를 여행했고, 나는 강릉-울진-대구를 여행했다. 각자 여행하고 3월 초, 대구에서 만나서 같이 놀고 서울로 올라오는 여정이 나름 즐겁고 신선했다. 이런 기분을 다음 여행으로 바로 이어가고 싶어서 늦은 봄의 제주 여행을 떠올렸다. 그러나 우리 가족이 움직이는 것에는 경비 문제도 있었지만, 일정 문제가 가장 해결하기 힘들었다. 나는 나름 바쁜 직장인으로, 연속해서 연차를 빼기 어려운 시기이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일하는 남동생은 아직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이제 일을 시작한 신입이 여행을 한다고 휴가를 빼기는 아무래도 눈치가 보일 테니. 


겨울은 짐이 많아지고 움직이기 힘드니 자연스레 가을 여행으로 일정이 정해졌다. 여름? 우리 가족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여름엔 잘 움직이지 않는다. 덥고, 사람 많고, 불쾌지수는 올라가기 때문이다. 여름은 엄마에게 특히 취약한 계절이기도 했다. 나 역시 여름휴가를 거의 가을이나 겨울로 미뤄 쓰는 유형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2년 계약이 종료되는 올여름에는 계속 회사를 다닐지, 퇴사를 할지 결정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재계약으로 같은 회사를 계속 다닌다면, 눈치 보면서 휴가를 위해 투쟁해야 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퇴사를 하더라도 바로 재취업이 된다면 이제 시작하는 직장에서 여행 간다고 휴가를 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래저래 타이밍이 중요했다. 


"언니, 연휴도 있다. "


앗! 9월 말과 10월 초엔 추석 연휴, 한글날도 연휴. 연휴들도 피해야 한다니! 이렇게 연휴가 줄줄 있게 되면 교육일정이 빡세지니, 내가 연차 내는 것에도 무척 지장이 많을 것이 분명했다. 굵고 짧게 고민한 끝에, 늘 그랬듯이, 나는 가족을 우선 택했다. 그래서 연휴가 끝나는 주에 여행 일정을 잡았다. 그동안 일을 열심히 해서 무조건 연차를 쟁취하거나 그도 안되면 그냥 퇴사해 버리기로 했다. 이미 회사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 때라 언제 퇴사해도 놀랍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계약일까지는 버텨보자고 이 악무는 시기였기에 가능한 소리였다. 어쨌든 이래저래 나의 사정으로 인해 우리 여행 일정은 10월 중순이 되었다. 

 



이젠 여행 경비를 해결해야 했다. 이전에는 여동생과 내가 주로 여행 경비를 마련하고 엄마가 조금 보태는 식으로 해결했다. 아쉽게도 남동생은 건강 문제로 몇 년이나 경제활동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남동생이 조금씩 경제활동을 하는 중이었다. 엄마와 여동생은 여행을 위해 돈을 모으기로 했고, 나도 작은 적금을 만들었다. 사실 나는 경비를 별도로 모으지 않고 여행 뒤 카드 빚을 갚아나가는 유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엔 엄마와 여동생을 따라 해 보기로 했다. 예전과 달리 내 재정상태가 최악을 벗어나서 빚 없이 적금을 가입하는 게 가능하기도 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대부분 여행의 경우, 여행 계획의 중요 부분, 즉 상세 일정과 예산 책정은 주로 내가 담당한다. 아무래도 여행사 직원으로 일하던 때 여행 상품을 만들고, 실행하고, 마무리 보고서까지 만들어 봤던 경력이 여기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상세 일정이 나오면 동선과 예산 짜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만, 아직 몇 개월이나 남은 여행은 중간중간 일정이 백 번도 넘게 바뀔 것이 자명했다. 대략 가고 싶은 곳을 물어봐도 엄마는 이전에 갔던 곳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시고, 여동생은 늘 그렇듯이 맛집이나 SNS용 카페를 우선 말했다. 남동생은 어차피 기가 센 두 여자 형제들에 의해 바뀔 것이라며 의견 내는 것 자체를 잘하지 않았다. 그래,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면을 따지지만 쓸 때는 쓸 줄 아는 타입들이었다. 숙박은 가족들이 묵기 편안하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찾아보고, 항공권은 최저가를 찾기로 했다. 고맙게도 제부가 렌터카 공짜 쿠폰을 선물해 주었다. 처음 예산을 책정할 때는 아직 항공권 예약이 불가한 때여서 대략 인당 80만 원을 잡기로 했다. 엄마와 여동생은 100만 원을 예상했다. 두 사람은 뭘 하든 넉넉하게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넉넉히 잡았는데 나를 믿지 않았다. 여행 중에는 잘 먹지 않는 나를 떠올려 보면 그럴 수도 있었다. 주로 먹는 것으로 돈을 쓸 건데, 올해 초 크게 체한 나는 먹는 양이 확 줄었다. 그러다 보니 여동생은 내가 식비를 크게 책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긴 듯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여동생이 찜해 둔 맛집이 비싼 곳일 지도 몰라서 반박하지 않았다. 여윳돈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까.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계속 다치고 일이 안 풀리는 남동생 문제로 엄마가 계속 걱정하시자, 여동생이 제부의 지인인 한 무속인에게 문의했다. 무속인의 말에 의하면 남동생은 섬 생활과는 상극이라고 했다. 결국 남동생은 다시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남동생의 백수생활이 다시 이어졌지만 엄마는 안도하고 좋아하셨다. 이 무렵 엄마의 기력이 급속도록 약해지셔서 차라리 남동생이 엄마 곁에 있는 것이 여러모로 안심되었다. 


내 경우에도 계속 회사에서 안 좋은 일들이 생겼다. 구인구직 사이트에 늘 공지를 내는 회사는 조심해야 하는데, 내가 있던 회사가 그런 회사였다. 더 이상 회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 계약을 끝으로 회사를 옮겨야 할 것 같았다. 나름 맡은 바를 다 한다고 계약일을 넘겨 일하게 되었다. 어차피 10월에 여행 가려면 9월까지는 일해도 되겠다 싶어서 회사와 일정을 조율했다. 그 후 끝까지 뒤통수친 회사에 정이 떨어져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원스레 퇴사할 수 있었다. 


가족 여행 세부 일정을 짜고 예산을 정리하는 중에 여동생이 항공권 예약은 본인이 부담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항공권 예약이 가능한 때에 바로 최저가를 찾아서 예약을 했다. 나름 예상보다 저렴한 비용에 잘 예매했다고 만족할 만큼 훌륭한 성과였다. 여동생은 내가 최초 책정한 예산이 생각보다 적어서 여유가 된다고 했다. 그리고 항공권과 콜밴 비용까지 부담하기로 했다. 중간에 한 번 더 여윳돈 생길 일이 있었던 여동생은 비행기 앞 좌석을 구매하기까지 했다. 나는 비행기 앞 좌석은 별도 비용을 더 내고 구매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여행 일정을 완성하고 동생들과 세부 조율을 하려 했는데 반응이 시큰둥했다. 그러다가 추석 연휴를 지나고 여동생이 갑자기 일정을 바꾸자고 해서 짜증이 치밀었다. 하라 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일정을 바꾸려니 귀찮기도 하고 언니 알기를 뭐로 아나 싶어서 화도 났다. 안 그래도 딴 놈이 사고 치면 뒷수습은 내가 해야 하는 직장을 떠나왔는데 집에서도 그러기는 싫었다. 적어도 지금은. 게다가 나는 추석 연휴가 끝난 다음 주에 있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교육 강사' 구직을 위해 시강(시범 강의의 준말) 및 면접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서 가족 여행 일정에 대해 나 몰라라 했더니 여동생이 눈치 보고 조용히 일정을 조율해 왔다. 


변수도 있고,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여행 일정을 완성! 

떠나는 날만 남았다. 


2023 가족 여행_일정표와 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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