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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연 Nov 15. 2023

제주도 가족여행 2일 차 ①

아름다운 극기 훈련?

내가 작년 가족여행 때 힘들었던 것은 우리 가족들이 너무 예민하다는 것이었다. 어디든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잘 자는 나와는 달리 자리가 바뀌면 깊이 잠들지 못하거나, 자더라도 작은 소리에 쉽게 깨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아침잠 많은 나를 깨우기 일쑤였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수면 장애로 인해 엄마와 여동생은 처방약을 복용 중이었는데, 그래선지 두 사람은 깊이 잘 잤다. 남동생은 여전히 제대로 못 잤다 하고, 나는 엄마와 여동생의 코골이에 잠을 설쳤다. 


제주도 여행 2일 차의 첫 일정은 성산일출봉에 올라서 일출을 보는 것이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성산일출봉을 오른 적이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운영하는 투어버스를 타고 독일인 친구와 씩씩대며 올랐는데 정상의 풍광을 보고 감탄하면서 내려온 경험이 꽤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예전에 제주도를 같이 여행했던 남동생과 여동생은 성산일출봉을 멀리서만 보고 올라가지는 않았다고 했다. 남동생도 언젠가는 성산일출봉에 한 번 올라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왕이면 이름답게 일출을 보면 좋을 것 같다고도 했다. 나 역시 낮에 오른 것이라 정상에서 보는 일출은 어떨까 궁금했다. 게다가 엄마와 여동생은 여행지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을 좋아했다. 한 가지 걱정은 엄마가 예전만 한 체력을 보이지 못한 것이었다. 




2023년 10월 15일 성산일출봉 일출 예상 시간은 6시 38분이었다. 숙소에서 차로 약 15분 정도 소요되는 곳에 성산일출봉이 있었고, 정상까지 아주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30분 정도를 잡으면 된다고 했다. 나는 아예 40분 정도 잡았다. 기상 시간은 오전 5시~5시 30분. 세수만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물만 챙겨서 나가자고 미리 이야기를 했다. 전날 술도 별로 안 마셨고, 제일 걱정했던 엄마도 일찍 주무셔서 푹 쉬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항상 복병은 숨어 있었으니. 어제 아침부터 춥다고 노래 부르던 여동생의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목구멍이 아프다고 해서 바로 일요일에 문 여는 약국을 검색했다. 거리가 먼 것은 둘째치고 문 여는 시간이 9시 이후였다. 당장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어서 숙소에서 쉴 것을 권해 보았다. 감기, 독감, 코로나 등등이 의심스러워서 증상을 물었는데 모두 아니라고 했다. 혹시 밤새 코골이 한 것과 연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했더니 여동생은 물과 사탕을 섭취했다. 다행히 따라나설 수 있을 것 같다고 했기에 나가려는데 전날 술이 안 깬다고 칭얼댔다. 


여동생은 나이차가 많이 나는 막내다 보니 가끔 어리광을 부렸는데, 취기가 있으면 특히 심했다. 여동생 기준으로 전날 술자리의 알코올 섭취량은 극히 가벼운 수준이었다. 그냥 바람을 좀 쐬면 정신이 들겠지 싶었다. 또, 본인도 숙소에 남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정보다 늦게 숙소를 겨우겨우 벗어나서 성산일출봉 주차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2023 성산일출봉 입구


차에서 내리기 전, 여동생의 목 보호를 위해 여행 때마다 챙기는 스카프를 건네주었다. 여벌로 챙겨 온 집업 카디건도 권했지만, 본인이랑 안 맞는 패션이라 여겼는지 그것은 거절했다. 폼생폼사인 여동생이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순간이었다. 엄마와 나는 물병을 하나씩 챙겼다. 입구 주변에 우리와 목적이 같은 사람들이 꽤 보여서 길을 찾는 것은 금방이었다. 나는 여동생을, 남동생은 엄마를 케어해서 천천히 한 발 한 발 오르기 시작했다. 


출발하자마자 여동생이 헛소리를 계속했다. 중간중간 정신이 드는 것 같은데 계속 장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어리광의 연속이었다. 살살 달래서 조금만 올라가자고 했다가, 힘들면 내려올 때 주워갈 테니 여기서 쉬고 있으라고 권하기도 했다가, 안 그래도 오르막이라 힘든데 오디오가 비질 않았다. 이미 출발 때에 먼동이 터오는 중이라 일출 보는 것은 반쯤 포기했다. 그냥 정상 찍고 내려오는 것에 의의를 두자며 천천히 발을 떼었다. 엄마도 중간중간 발을 헛디디거나 힘들어하셔서 중간에 그만 오를까 물어봤다. 그러나 근성 충만한 우리 가족들! 일단 올라가 보자며 이 악물고 포기를 몰랐다. 게다가 엄마는 중간에 다른 사람들과 약간의 경쟁을 하는 패기도 보여 주셨다. 


"다 왔어. 여기만 올라가면 돼."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해서 여동생에게 신뢰를 잃을 무렵 어떤 아저씨 한 분이 똑같은 멘트를 그분의 일행에게 건넸다. 잠깐 쉬던 여동생이 벌떡 일어나서 성큼성큼 오르다가 아직도 남은 길을 보고 "아니잖아! 다 왔다며!"하고 칭얼거렸는데, 멘트 날린 아저씨의 일행도 똑같이 반응해서 순간 너무 웃겼다. 그런데 딱 그 지점에서 정상까지는 진짜 금방이어서 우리는 곧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정상에 있는 계단에 다닥다닥 앉아 있었다. 그 계단 한편에 우리 식구들이 자리 잡고 앉으니 누군가 "6시 34분인데 아직 해 안 뜨네"라고 해서 한 번 더 놀랐다. 세상에! 그렇게 힘들게 천천히 올라왔는데 아직 일출 예상 시간인 6시 38분이 안되었던 것이다! 


2023 성산일출봉 정상 (일출 전 / 일출 후)


아직 해뜨기 전에 찍은 사진에서는 마치 패잔병 같지만, 구름 사이로 솟는 태양을 보고 우리 가족을 포함한 이곳의 모두는 환희와 승리의 모습을 보였다. 처음엔 구름이 있어서 일출 보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남동생 역시 자기 혼자였으면 그냥 내려갔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보니 구름 위로 올라올 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뜨고 지는 해가 뭐라고 이렇게 다들 고생하면서 오르고, 내리고, 기다리는 건지. 나 역시 적극적으로 참여해 놓고 잠깐 현타가 왔다. 그런데 구름 사이로 황금색 빛줄기가 보이는 순간, 그저 감탄만 나왔다. 그렇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힘들게 온 거지!  


2023.10.15 성산일출봉 일출


여행을 마치고 엄마에게 이번 4박 5일 여행 중 가장 좋았던 일정이 뭐냐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성산일출봉에 일출 보러 간 것이었다고 답해 주셨다. 아마도 근래 떨어진 기력으로 스스로도 걱정하셨다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성산일출봉에 올라 아름다운 일출을 보고 그들이 느낀 환희와 승리의 기쁨을 같이 누렸던 것이 좋으셨나 보다. 나도 어차피 내려올 거 왜 올라가냐며 등산은커녕 계단도 싫어했는데, 이 순간만큼은 성산일출봉에 잘 올랐다고 뿌듯해했다. 남동생도 여행에서 웬 극기훈련이라고 투덜대면서도 성산일출봉 일정을 맘에 들어했다. 




사진 찍을 때는 멀쩡한 정신으로 촬영 잘하더니 이상하게도 내려올 때도 여동생의 헛소리는 계속되었다. 아직 헛소리를 하면서 빨리 내려 가려하길래 너무 빠르게 내려가지 못하도록 약간의 꾀를 냈다. 바로 내가 너무 힘들고 다리 아파서 자주 쉬어야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평소에 운동 부족인 것도 있고 어릴 때부터 자주 아팠던 무릎이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실제로 내려가다가 허벅지나 종아리가 살짝씩 당기는 느낌도 있었다. 이 꾀는 엄마를 위해서도 좋았다. 엄마도 마음껏 천천히 오르내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동안 우리를 스쳐간 단체와 가족들이 많았는데 다 가오 세어도 100여 명은 되는 듯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약속한 것도 아닌데 한 날 한 시에 같은 장소에서 함께 감동의 순간을 함께 했다는 게 감동적이었다. 


2023 성산일출봉


주차장으로 가니 여동생이 흘린 이어폰이 차 옆에 얌전히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에서는 물건 단속을 더 단단히 해야 할 것 같았다. 잃어버린지도 모르게 다시 찾은 것이 여권에 이어 이어폰까지 연속으로 두 번이나 되니까. 지금 와서 이 부분이 좀 재미있는데, 이후에도 계속해서 잘 챙겨놓고 물건이 없다고 하는 등 거의 물건의 행방에 대해 소소한 강박증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튼, 늘 아침을 드시는 엄마를 비롯해서 눈 뜨자마자 등산해서 허기가 진 우리는 미리 점찍어 놓은 식당으로 향했다. 성산일출봉 부근의 <고궁보말손칼국수>라는 맛집이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거길 갈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우리 외에 한 테이블만 더 있을 뿐이었다. 메뉴는 단출하게 몇 개 없는 집이었는데, 우리는 보말손칼국수 하나, 보말죽 둘, 보말성게국 하나를 주문했다. 


내가 제주도 여행 때마다 찾는 것 중 하나가 성게 미역국이다. 미역국을 좋아하지 않아서 생일에도 뭇국을 먹는 나인데 이상하게 성게 미역국은 내 입에 잘 맞았다.  <고궁보말손칼국수>가 진짜 맛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보말성게국뿐만 아니라 보말죽, 보말손칼국수 모두 맛이 좋았다. 입맛 까탈스럽고 입도 짧은 남동생 역시 성게국이 맛나다고 했다. 죽을 죽을 만큼 싫어하는 내게는 보말죽이 그냥 맛난 죽인가 보다 정도였는데, 맛을 아는 엄마와 여동생은 다른 집보다 진하고 고소하다고 했다. 여행 마지막까지 이 집을 기억할 정도였다. 보말손칼국수는 진짜 손칼국수였는데 이게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여동생이 제 몫의 보말죽을 제쳐놓고 남동생의 칼국수를 뺐어 먹었다. 반찬이 셀프라고 해도 음식가격이 저렴한 편이었다. 그냥도 내돈내산으로 광고해 주고 싶은 맛집인데 가성비 맛집이기까지 하다. 다음에 혹시 또 성산일출봉을 지나게 되면 꼭 다시 가보고 싶다. 


<고궁보말손칼국수>의 보말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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