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웠고, 무서웠고
"비양도에 차가 들어간다고?"
우도 해안도로를 도는 김에 비양도를 들어가자 했더니 남동생이 깜짝 놀랐다. 자신이 아는 비양도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내가 차로 들어간다 하니 놀란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제주도 부근에 또 다른 비양도라는 섬이 있었는데 동명의 섬을 모르는 나로서는 거제도처럼 다리가 있어서 차로 들어가는가 보다 했다. 이 여행을 몇 개월 전부터 준비하고 기대한 것 치고는 그 누구도 사전 조사를 제대로 안 했으니 웃긴 일이다.
제주도 보다 작은 우도, 우도보다 작은 비양도. 그 작은 비양도에서는 포토존 아닌 곳이 없었다. 날씨마저 기가 막히게 좋았다. 비양도 입구에 들어서니 아까부터 간간이 보이던 작은 전기차들이 종류별로 보였다. 운전 중일 때는 오토바이만큼 걸리적거려서 신경 쓰이더니 주차해 놓은 모습을 보니 옹기종기 귀엽기만 했다. 우리 가족들은 곧 비양도에 푹 빠졌다. 나름 경쟁이 있는 소원성취 의자에 차례대로 앉아서 사진을 찍자 하니 남동생이 거부했다. 녀석은 사진 찍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엄마의 한 마디, "아들과 같이 찍은 사진이 없어." 이 말에 냉큼 앉아서 엄마랑 다정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비양도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우리는 다음 목적지를 검멀레 해수욕장으로 잡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다리가 부실한 엄마와 나는 이미 많이 지쳐 있어서 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길을 가는 대신 어딘가에서 잠깐 쉬길 원했다. 마침 점심 식사를 하기로 한 식당이 근처였지만, 아침 식사를 너무 잘 먹은 나머지 배는 고프지 않았다. 엄마는 원래 이른 아침에 간단한 조식을 드시고 점심 식사를 칼같이 하시는 분이지만, 엄마 기준으로 늦은 아침에 식사를 했기 때문에 그다지 생각이 없었다. 우리 삼 남매는 원래 아침을 안 먹는데 거하게 먹어서 배가 덜 꺼진 것이고. 기가 막히게도 점심 식사를 하러 들어간 우도에서 정작 식사를 하지 못하는 웃긴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합의한 곳은 근처 카페. 엄마가 망고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선택한 <리치 망고>라는 카페는 작은 규모였지만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재미있었다. 물론 음료 맛도 좋았고! 심지어 나는 이 날 남은 내 음료-'망고 코코넛'이 마음에 들어서 남은 음료수를 얼음컵에 넣고 얼려서 다음 날 아침까지 마셨다. 커피를 제외하고 남은 음료를 끝까지 마시려고 노력한 것은 최근 몇 년 동안 '망고 코코넛'이 유일했다.
음료를 다 마실 즈음 여동생이 우도까지 왔는데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을 못 먹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리치 망고>의 아쉬운 점은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이 없다는 것이었다. 엄마와 여동생은 차로 가서 기다리기로 하고 당충전으로 생기가 도는 나와 남동생이 아이스크림 사냥에 나섰다. 언덕길 위 100 미터 내에서 서로 원조라고 경쟁하는 집들이 있었다. 윗집은 호객행위를 꽤 시끄럽게 하고 호응도나 구매하는 아이스크림 개수에 따라 과자를 얹어주는 등의 서비스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음료수로 배가 부른 우리에게는 윗집보다는 그나마 사람이 조금 덜 있고 있는 그대로의 아이스크림만 판매하는 아랫집이 더 좋아서 거기에서 아이스크림 두 개를 샀다. 차로 돌아와서 그 유명한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먹었다. 그냥 셔벗 아이스크림에 땅콩 가루를 뿌린 것에 지나지 않아서 식감은 그저 그랬다.
우도를 시계방향으로 온전히 한 바퀴 돈 우리는 입도한 항구에서 다시 승선하기로 했다. 원래는 성상포행 페리가 오가는 항구가 둘이었지만, 마침 우리가 도착한 항구로 페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우도로 들어올 때보다 큰 페리여서 차량이 열 대 넘게 승선했다. 성산포행 페리에서는 1층 객실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거기로는 잘 안 와서 출항하기 전까지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끼리 있었다. 분명 30분마다 페리가 떠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우리가 탄 페리는 1시간을 정박해 있다가 출발했다. 출발 직전에 승선한 구급차를 기다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기다리는 한 시간을 객실 바닥에 누워 보내려는데, 우리 가족 말고 들어선 한 남자 승객의 발냄새가 너무 심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화장실 냄새라고 할 정도로 끔찍한 발냄새였는데 본인은 모르시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그 와중에 여동생은 깜빡 잠들기까지 해서 발냄새를 못 맡았다고 했다. 역시 이 날 여동생 컨디션은 이상했다.
아름답고 즐거운 추억을 가득 쌓은 우도를 뒤로 하고 우리는 바로 섭지코지로 향했다. 딱히 섭지코지를 갈만한 명분은 없었지만, 그냥 제주도 동부에 몰려 있는 관광지라 일정에 넣었다. 사실 우리 가족은 예전에 각각 섭지코지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명확하게 그곳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섭지코지는 우리에게 큰 감흥을 주진 못했다. 이번에도 별다른 기대 없이 그저 저녁을 먹기 위해서는 소화를 빨리 시켜야 한다고 산책하러 간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가족끼리 오래 기억할 해프닝이 생겼다.
선돌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 바닷가 쪽 바위 두 개가 서로 마주 보는 형상이 있었는데 한쪽이 고래 모양을 닮았다. 분명 전에 왔을 땐 고래 모양이 아니었기에 의아해했다. 여기도 돌이 자연 풍화가 많이 되는 것 같다고 의견을 나눌 때였다. 갑자기 엄마가 고래가 어딨냐고 하셨고, 우리는 바위를 가리키며 언뜻 고래를 닮아 보인다고 했다. 엄마는 암만 봐도 금붕어인데 어떻게 고래냐고 하셔서 우리 삼 남매는 웃음보가 터졌다. 농담으로 금붕어가 바닷물에 들어가면 살 수 없다고도 했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니 다르게 보일 수 있다고 인정했다. 가족이지만 서로 다른 관점이 있고, 자기주장이 있는 것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농담으로 이해해 보는 시간이었다.
웃고 떠들며 재미있는 시간이었지만 우도를 열심히 돌아다닌 덕분일지 섭지코지는 적당히 왕복 1시간 정도의 시간만 산책을 하고 차로 돌아왔다. 역시 체력이 달리면 여행을 맘 놓고 하기 힘들다. 또한 소화를 제대로 못 시키면 산해진미를 눈으로만 맛봐야 하는 것이 슬프다. 엄마는 체력만 저하되신 거지만 나는 체력 저하와 소화불량이 같이 와서 더 슬펐다.
2일 차 일정은 섭지코지가 마지막이었기에 우리는 야식을 책임질 하나로마트로 향했다. 그러나 딱히 당기는 야식거리는 없어서 숙소 근처 치킨 집에서 공수하기로 하고 술과 음료, 이튿날 아침거리만 챙겼다. 그러고도 아직 배가 고프지 않은 늦은 오후여서 우리는 일단 여동생이 생각해 둔 디저트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카페였는데 커피와 디저트뿐만 아니라 술도 파는 독특한 곳이었다. 놀랍게도 전날 밤에 내가 구박받으면서 찾은 편의점, 바로 옆의 불 꺼진 카페가 오늘 방문 예정인 곳이었다. 이래서 사람 인연은 어떻게 될지 모르고 내일의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전날까지만 해도 이상한 가게였던 곳이 오늘은 신기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워너비 카페가 되었으니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휘낭시에 4개를 구매했다. 얼마나 맛있었는지, 여동생과 엄마가 다 해치워 버려서 나와 남동생은 한 개도 맛보지 못했다.
휘낭시에를 안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장본 것들을 정리하고 1층에 위치한 무인 카페도 돌아보며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 슬슬 출출함이 느껴질 즈음 치킨을 사러 누가 갈 것인가를 정했는데 나와 남동생이 당첨됐다. 치킨 집이 숙소에서 도보 10분 내외였지만, 초행길에 인적이 드문 동네이기 때문에 차로 이동했다. 네이버에서 얻은 정보와 다르게 <종달 삐삐 통닭> 집은 주차가 안 되는 곳이었다. 그걸 모르고 좁은 골목을 낑낑대며 들어갔는데 사장님이 놀라서 뛰어나오셔서 우리가 너무 들이댄 것을 알았다. 마음씨 좋은 사장님은 잠깐 주차하는 것은 괜찮다고 했지만, 워낙 좁은 공간이라 차를 돌려 나가기가 어려웠다. 결국 내가 치킨을 주문하고 기다릴 동안 남동생이 후진을 차를 뺐다가 다시 후진으로 골목을 들어와 주차를 시켰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사장님과 아마도 주방일을 하실 듯한 분이 계셨다. 주문과 동시에 두 분은 가게 안쪽 주방으로 사라졌고, 남동생은 차를 돌리러 가서 한동안 홀에는 나만 남았다. 가게 안쪽에 자리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문 앞에는 약간 넓은 두 개의 테이블만 있고 왼쪽 벽면은 빔프로젝트로 쏘는 TV 영상이 보였다. 치킨은 주문과 동시에 준비를 하시는지 튀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TV 영상이 마침 '1박 2일'이어서 재밌게 시청하느라 지루하지 않았다. 예고편으로 봤을 때도 재미있겠다 싶었던 프로그램이라 더 몰입해서 보고 있었다.
한참만에 남동생이 들어오더니 건너편 테이블 아래의 고양이를 보고 좋아했다. 그때까지 나는 고양이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내게 고양이털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기 때문에 거리 두기를 하면서 TV를 계속 시청했다. '런닝맨'이냐며 자리에 앉은 남동생에게 프로그래 명을 정정하고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약간 더 시간이 지나서 치킨 포장이 나왔고 그대로 차에 오른 나는 계속해서 TV 소리를 들으면서 물었다.
"왜 네비 안 켜?"
"왔던 대로 가면 되는데 뭐, "
"아까 온 길은 좁으니까 큰길로 가자."
"……."
남동생과 나는 길눈이 밝은 편이다. 우리가 온 길이 외길이기도 했지만 금방 외웠고, 바로 옆의 도로와 연결된다는 공간지각력도 있었다. 다만 내 경우에는 밤눈이 어둡기 때문에 외길이 작고 좁았던 것만 기억하고 그나마 불빛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도로로 나가자고 한 것이다. 이때까지 '1박 2일'의 출연진 소리가 계속 나와서 남동생이 뭔 난쟁이 이름을 그렇게 못 대냐고 한심해했고, 나는 의외로 외우기 어렵다고 변론해 주었다.
그런데!
"너 핸드폰으로 TV 켰어?"
"아니."
"그럼 이 소리는 어디서 나는 거야?"
"…??…!!"
순간적으로 머리가 쭈뼛 서고 오싹해지면서 공포 영화의 단골 멘트가 저절로 나왔다.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아서 손도 안 댄 기계에서 DMB가 저절로 작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주파수도 알맞게 잘 맞아서 끊김 없이 치킨 집에서 들었던 소리를 그대로 연결해서 들려주었다.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한동안 인식을 못 했다. 소름 돋는 현상에 내가 당장 차를 교체해야 한다고 난리 쳤다. 이 놈의 DMB는 어떻게 멈추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숙소 앞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DMB를 끄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시동을 껐다 켜도 소용이 없어서 남동생이 핸드폰 음악 파일을 블루투스로 연결했다 끊으니까 꺼졌다. 그러고 나서하는 남동생의 소름 돋는 증언이 계속되었다. 여행 첫날, 내게 말한 이상 외에도 자잘한 고장이나 이상현상이 차를 탈 때마다 하나씩 발견되었다고 했다. 나는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엄마랑 여동생에게 이야기했고 여동생은 렌터카 전문인 제부에게 자문을 구했다. 다행히 이런 경우는 렌터카 회사에 연락하면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서 교체할 차를 가지고 방문해 준다고 했다. 우리는 렌터카에 연락했고 직원이 바로 와준다고 했다. 아침에나 교체될 줄 알았는데 바로 와준다고 하니 좋았다. 다만, 렌터카 직원이 올 때까지 맘 놓고 술을 못 마신다는 게 조금 아쉬운 점이었다.
1시간 여만에 렌터카 직원이 와서 보다 상위 모델로 차를 교체해 주었다. 직원이 와서 시동을 거니까 내비게이션 첫 화면이 나왔다. 그러니까 화면에서 길 찾기를 할 건지, DMB나 다른 버튼을 누를 건지 보여주는 인트로 화면 말이다. 그런데 남동생 하는 말이 자기는 이 렌터카를 받고 그 화면을 처음 봤다고 했다. 첫 화면부터 길 찾기가 보여서 요즘 신형 모델들은 다 이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사실 그 지점부터 렌터카의 소프트웨어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직원이 와서야 알게 된 것이다. 하드웨어적으로도 이틀 내내 끌고 다닌 차의 유류계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는 것, 핸들을 돌릴 때나 브레이크 밟을 때 밀림 현상, 뒷좌석의 여닫이 문이 자동으로 닫혀야 하는데 닫혔다가 열리는 현상 등등. 문제가 너무 많아서 다 말하지 못했다. 직원은 일단 시스템이 잘 작동하는 것을 보았기에 우리말을 다 믿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그 직원 분이 가실 때 한 마디 더해 주었다.
"상향등 고정 안되니까 가실 때 조심하세요."
아닌 밤중에 호러 영화 한 장면을 찍게 되었지만, 치킨과 맥주는 너무너무 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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