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일보다 힘든 여행일정
3일 차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 가족은 숙소를 정리했다. 동쪽과 서쪽에 각각 숙소를 잡아두었는데 이날은 동쪽 숙소를 체크하는 날이었다. 가장 빠르게 짐정리를 마친 남동생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짐을 내리거나 분리해 둔 쓰레기를 수거함에 버리러 갔다. 펜션 건물 옆쪽으로 분리수거함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남동생이 음식물 쓰레기 통을 못 찾아서 잠깐 놀림을 받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여동생의 짐정리가 가장 늦게 끝났다. 이 와중에 남동생은 펜션 사장님을 만나서 한참을 얘기했단다. 친화력 좋은 녀석.
첫 일정은 '만장굴 관람'이었다. 내가 처음 만장굴을 찾았을 땐 여름이었다. 무더운 바깥 날씨에 비해 동굴 내부는 서늘해서 천연 에어컨 역할도 했고, 용암이 지나간 자리를 더듬어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이 좋았다. 기억에는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아서 언젠가 엄마와 꼭 다시 가고 싶은 곳이었다. 일정에 넣자마자 투덜대는 가족들에게 일정이 맞지 않으면 안 가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이르게 시작한 우리 가족이 아침 시간에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인지심리학자인 김경일 교수님이 말한, '여행을 근로자들보다 더 힘들게' 수행하는 한국인 대표가 바로 우리 가족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투덜대며 찾았던 동굴을, 그래도 공개 코스 거의 끝까지 다녀왔다는 점이다.
나중에 가족들은 만장굴 관림에 대해 가장 나쁜 평을 주었다. 모든 일정이 좋았다면서도 엄마는 석회동굴이 취향이라 별로라 했고 이럴 때만 효자효녀인 동생들도 엄마 따라 평점을 깎아 버렸다. 오픈 런을 하는 바람에 중국인 단체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나름 쾌적하고 여유롭게 동굴을 지나게 되어 좋았던 것은 그냥 나 홀로 만족이었다. 이제 만장굴은 다시 안 갈 것 같다. 적어도 우리 가족들이랑은.
원래 아침 식사를 하지 않는 나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숙소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한 상태였다. 아무리 만장굴이 힘드니, 극기훈련이니 해도 아직 그들의 부른 배는 꺼지지 않았다. 맛난 점심을 예정해 두었기에 우리는 오로지 배가 고프기를 기대하며 다음 일정을 '비자림'으로 잡았다. 3일 차 일정 중 내가 가장 기대하는 일정이었다. 최근 3~4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제주도를 방문하면서 비자림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대중교통이 없어서라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이번에 방문해 보니 바로 입구까지 버스가 다니고 있었다. 내 정보가 잘못되었던가, 아니면 최근에 노선이 생겼을 것이다.
비자림 일정도 역시 걷기의 연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선 카페에서 원기 충전을 하기로 했다. 예정했던 카페를 여동생이 퇴짜 놔서 찾게 된 것은 비자림 주차장 옆에 위치한 <친절한 비자씨>라는 곳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카페는 아기자기했고 사장님은 정말 친절하셨다. 여기에서 여동생은 당근 주스에 반해서 믹서기를 구입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이게 정말 진심이었던 것이, 이후로 어디를 가나 그놈의 당근 주스 타령이 이어졌다.
'피톤치드 힐링'이라고 명명하고 이 코스를 짰을 때만 해도 비자림에 대한 기대는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 다른 비자림에 나는 금방 흥미를 잃어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숲의 이미지는 맞지만, 사람들에게 너무 치이다 보니 피곤했다. 우리가 생각한 포토존은 그들에게도 포토존이었고, 쉬는 공간이 분명한 곳에서는 눈치 게임을 해야 했다. 만장굴을 걷고 비자림도 걸어야 하다 보니 엄마도, 나도 금세 지쳤다. 그만 차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여동생이 '비자나무 사랑나무'라고 하는 연리목을 꼭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날은 카페 건부터 시작해서 계속 여동생과 시비가 붙을 뻔했는데 이번에도 가니 마니로 실랑이가 벌어졌다. 가까스로 엄마의 중재가 들어와서 결국 비자림 탐방 코스를 모두 돌았다. 내 생각엔 비자림도 다시 방문할 일이 없을 것 같다.
내게는 정말 극기훈련이었던 비자림 산책을 마친 후 우리는 드디어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이동했다. 3일 차는 일정이 많은 대신 이동시간은 짧아서, 거의 대부분이 10~30분 정도였고 딱 한 군데만 40분이 소요됐다. 비자림에서 식당까지도 25분 정도 시간이 걸렸는데 다행히 배가 고파왔다. 식당은 넓은 편이었고 통상적인 휴양지 점심시간보다 약간 이르게 도착해서 빈자리도 많았다. 우리가 자리 한 옆의 단체 예약 자리는 아직 손님들이 들어오기 전 세팅 상태였다. 쾌적하게 점심 식사를 시작한 우리는 눈도 즐겁고 입도 즐거웠다.
식당 이름이 <삼신 할망 밥상>이었는데, 이제 보니 메뉴 이름도 '삼신 할망 밥상'이었다. 이외에도 어느 메뉴와 세트로 이뤄졌는지에 따라서 '하르방 밥상', '가시어멍 밥상' 메뉴가 있었다. 우리는 순살 갈치 튀김과 고등어조림으로 조합을 이룬 세트였고 각자의 취향에 잘 맞았다. 그야말로 게눈 감추듯이 폭풍 흡입을 했다. 메인 메뉴뿐만 아니라 곁들인 반찬들도 하나같이 맛났는데, 심지어 갈치 위의 당근까지 맛났다. 이때 또 여동생은 당근 주스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이렇게 그냥 먹어도 맛난 당근이라면 뭘 해도 맛나다고 대꾸해 주었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본 어느 한의사의 말을 인용해서 '매일 먹어도 해가 되지 않는' 당근의 효능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느릿하게 식사하는 여동생조차 이때는 빨리 먹었던 것인지, 우리가 식사를 마칠 즈음, 옆의 단체석에 손님들이 도착했다. 모든 단체가 그렇지 않을 것이고, 모든 중국인들이 그렇지 않을 것이지만, 이 날의 중국인 단체는 모두 시끄러웠다. 마침 식사도 마쳤겠다, 배도 부르겠다, 우리는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음 일정으로 향했다. 오늘의 투어는 일정이 많아서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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