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의 요정
4일 차는 느지막이 시작했다. 그동안 계속 잠을 제대로 못 잤던 남동생이 간밤의 과음으로 푹 잠들어버려서 우리의 발이 묶였던 것이다. 기사님이 숙면 중이시는 엄마와 나, 여동생은 아침 산책을 나서기로 했다. 숙소 뒤쪽은 제주도에서 그렇게 흔하다는 감귤밭이 작게 있었다. 아마도 사장님이 소일거리로 하시거나 펜션 행사로 수확 체험 이벤트를 하지 않을까 짐작해 봤다. 다시 앞쪽으로 가니 숙소 바로 옆에 석탑이니 석상이니 해서 불교용 돌 장식들이 여럿 보였다. 아마도 이렇게 만들어서 판매한다고 하는 전시장 같은 곳으로 보였다. 이른 아침임에도 햇살이 강렬해서 바깥에 오래 있지는 않고 숙소 주변만 돌아다니다 다시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이때까지도 남동생은 잠들어 있었다. 밤에 몰래 편의점 다녀온 일을 얘기했다가 엄마에게 나만 혼났다. 그래도 푹 잠든 것은 좋은 거 아닌가? 아무튼 일정에 차질 있지 않게 적당한 시간에 남동생을 깨워서 4일 차 여행을 시작했다.
가족여행 4일 차의 첫 행선지는 <이가도담해장국>이라는 식당이었다. 전날에 거하게 마셨으니 해장국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니 사실은 여기서 해장하려고 마신 것도 없지 않았다. 식당의 전 메뉴라고 해 봤자, 3종류가 다여서 우리는 '몸국' 두 개와 '내장탕', '(선지) 해장국'을 각각 하나씩 주문했다. 술 마신 다음 날 해장국만큼 맛난 것은 또 없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식당의 메뉴들은 모두 맛이 훌륭했다. 나는 내장탕을 먹었는데 한참을 먹어도 줄지 않는 것이 양도 꽤 많은 것 같았다. 원래 아침에 뭘 잘 먹지 않은 내가 절반 가까이 먹었는데도 많이 못 먹는다 구박하던 여동생이 제 몫의 몸국을 먹다 말고 내장탕을 가져갔다. 그리고 내장탕도 맛있다며 배가 부른 내게 몸국을 내밀었다. 그냥 먹고 싶다고 하지 그랬냐며 핀잔을 줘 봤자 씨알도 안 먹혔다. 우리 집은 막둥이가 슈퍼 갑의 신분이다.
해장국 다음에는 해장 커피가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식당에서 20분 정도 거리인 곽지해수욕장 부근의 <애월빵공장 앤 카페>에 도착했다. 엄마는 오래전부터 '빵순이', '떡순이'였기에, 엄마를 위해서 제주도에서 유명하다는 빵집 하나는 들리고 싶었다. 당연히 엄마는 뭘 그런데 가냐고 툴툴 댔지만, 항상 그랬듯이 결과적으로는 좋아하셨다. 원래일정 대로라면 카페 다음의 우리 목적지는 '관음사'여야 했다. 그러나 '관음사'를 가게 되면 늦게 시작한 여정이라 오전 일정이 빠듯해질 터였다. 쉬러 온 여행을 힘들고 다급하게 다닐 필요는 없었다. 또한, 가족들 모두 카페를 마음에 들어 해서 짧게 머물고 떠나기에는 뭔가 좀 아쉬웠다. 그래서 '관음사'를 포기하고 카페에서 머무는 시간을 늘렸다. 사실 테이블 당 매출을 많이 올려 주는 우리 가족들은 회전율도 좋은 편이다. 밥이든 커피든 일단 다 먹고 마셨으면 일어나야 하는 엄마와 남동생 덕분에 카페에서 여유를 부리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빵 공장 겸 카페에는 조금 오래 있었는데, 그나마 각종 빵과 기념품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서 채운 시간이었다.
<애월빵공장 앤 카페>는 이름답게 빵 종류가 다양했다. 생각 같아서는 하나씩 종류별로 다 맛보고 싶었지만, 우리의 제주 여행은 이제 거의 막바지였기 때문에 4일 차 점심과 5일 차 아침을 대신할 것으로만 구매했다. 그리고 음료와 같이 먹을 디저트는 작은 크기의 무스 2 종류로 주문했다. 배가 너무 부른 상태에서 왔기 때문에 무스는 거의 시식 수준으로만 먹을 수 있었다. 주문은 1층에서 하고 우리는 2층 자리에서 바다와 하늘을 구경하며 음료를 마셨다. 제법 유명한 카페답게 건물 곳곳에 포토존이 많았는데 아예 4층 루프탑은 SNS용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음료를 마시다 말고 여동생과 남동생은 4층 루프탑을 보러 간다며 자리를 비웠다. 엄마랑 한참을 이야기해도 오지 않아서 그냥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사진도 찍는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괘씸해서 뭐라 했더니 이번에는 넷 모두 올라가서 사진을 찍자 해서 부는 바람에도 좋다고 여러 포즈를 취했다. 날씨가 미친 듯이 좋아서 슬쩍 찍어도 명작이 되었다.
먹었으니 이제 관광을 할 차례다. '서귀포 유람선'으로 인터넷에서 검색하다 보면 간혹 여러 오후 시간대가 나오는데, 전화해서 문의하니 오후 14시가 마지막 시간대였다. 우리는 1시간 동안 아주 여유롭게 드라이브를 하여 서귀포 유람선 매표소 앞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이 작은 것에 비해 여유롭다 싶었는데도 매표소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도 페리를 탑승할 때 한 번 써 봤다고 남동생이 자연스럽게 승선 신청서를 썼다. 약간의 시간이 있어서 화장실도 다녀오고 잠깐 한숨을 돌리다가 유람선에 올랐다. 인터넷에서 많은 블로거님들이 조언해 준 대로 우측 좌석에 앉기 위해 나는 1층을, 여동생은 2층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1층 뒤쪽 자리에 두 명씩 앉을 수 있는 자리에 냉큼 앉았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증표로 사서 나눈 돌고래 모양 핀을 모자와 머리에 꽂는 등 여유를 맘껏 부렸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출항하기 전까지 꽤 많은 사람들이 승선을 했다.
뱃멀미가 있는 나는 그 흔한 한강 유람선을 포함해서 오래도록 유람선을 타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내가 여행사 직원으로 일할 때 얻은 공짜표로 엄마와 '팔미도 유람선'을 탔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내가 뱃멀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때였다. '팔미도 유람선'에서의 볼거리는 어르신들을 위한 공연이 주를 이뤘다. '서귀포 유람선'에서는 아마도 2층 무대에 서 있을 가이드의 재치 있는 입담으로 한 시간을 순삭 시켜 주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멘트로는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과 영수증뿐'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여행에서든 영수증을 담당하는 내게 깊이 와닿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근방에 잠시 살았던 남동생이 나를 놀리느라 나와 이름이 같은 '세연교'를 그렇게 들먹였는데, 유람선 코스의 첫 번째가 그 '세연교'였다. 내가 좋아하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에서 나왔던 곳이기도 했다.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지만 이 장소가 드라마에 나왔다는 것은 가이드의 안내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것이다. 가이드는 또한, '세연교'의 상징인 하얀색 조형물이 멀리 보이는 한라산 가운데로 위치하면 그때 위로 뾰족하게 솟은 조형물의 끝부분이 가리키는 곳이 한라산의 정상이라고 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저 멀리 한라산이 뚜렷하게 보였는데, 심지어 정상까지 맑아서 그림 같이 예뻤다.
그렇게 시작한 유람선은 역사 이야기와 함께 문섬, 범섬, 섶섬을 차례로 돌았다. 남동생이 계속해서 바다 너머로 계속 알려준 섬들이었다. 세 개의 섬들 중 하이라이트는 범섬이었다. 서귀포 바닷가에서 본 주상절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절경인 주상절리가 있던 동굴에 뱃머리를 살짝 넣었다가 뺄 수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가이드 님이 오늘 여행 날짜 잡은 사람이 누구냐고 손을 들어 보라 했다. 1층에 앉은 나를 2층에 있는 사람이 볼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나는 손을 들고 장난스럽게 '저요, 저요' 했다. 잠시 뒤 가이드는 섬에 살짝 들어가서 위치한 동굴은 날씨가 좋고 파도가 잔잔해야 뱃머리를 들이밀 수 있는데 마침 오늘이 그런 날이니 운이 좋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오늘로 날짜 잡은 사람에게 일행들이 고마워해야 한다며 농담을 했는데 나는 이 말에 되게 의기양양했다.
사실, 엄마가 제일 반대했던 코스가 서귀포 유람선 관광과 쇠소깍 카약 체험이었다. 쇠소깍 카약이야 미리 예약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기에 놓쳤지만, 서귀포 유람선은 사용 기간이 넉넉한 번들 티켓으로 할인받아 구매했기에 간신히 밀어 부칠 수 있었다. 그 번들 티켓도 제주도에 도착해서 분위기를 몰아가면서 예매한 것이었다. 여행 2일 차 우도 관광이 생각보다 대박을 쳤기에 가능했다. 멋진 날씨와 잔잔한 파고는 내 뱃멀미를 잔잔하게 했고, 찰진 멘트로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가이드와 아름다운 풍광은 여유롭고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여행을 마치고 가족들이 리뷰하면서 꼽은 가장 마음에 드는 일정 베스트 3에 이 서귀포 유람선이 들어간 것은 이 행복한 기분 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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