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리까지 완벽하게
전날의 과음에도 불구하고 공기가 좋아서인지, 안주가 좋아서인지 우리 가족들은 일찍 일어났다. 게으르게 일어나서 브런치 먹고 커피 한 잔 한 다음 공항에 가려 했는데 마지막까지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우리, 가족이었다. 이제 신나게 돌아다니고 즐겁게 먹고 마시던 날들을 마무리하는 날인데도 말이다. 나는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면 거의 매년 제주도를 찾았지만 이번 여행만큼 아름답고 행복하고 충만한 기억으로 가득 찬 날들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여행들은 다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렇게 모든 날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좋은 것을 같이 보고 낯설지만 재미있는 체험을 함께 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도 좋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생애 전반을 함께 해 온 가족들과 누린다는 것이 축복이고 행복이었다.
축복인 가족 여행 5일 차이자 마지막날의 첫 일정은 아침식사였다. 먼저 폭풍 검색을 통해 시내가 아니면서 일찍 문을 연 식당을 찾았다. 검색의 조건은 일단 보말죽이 있을 것, 숙소에서 가까울 것, 공항 가는 길에 있을 것 등등이었다. 다행히 공항 가는 부근에 평점이 높은 <제주검정보리마씸>이란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메뉴는 몇 개 없었지만 우리가 먹고 싶은 것은 있었기에 '보말죽' 2개와 '검정보리 보말칼국수' 2개를 주문했다. 밑반찬이 여럿 나왔는데 조금 특이하기도 하고 맛도 있었다. 그중 전복된장에 보리밥을 비벼 먹도록 나온 것은 아마도 칼국수와 세트로 나오는 것 같았다. 밑반찬을 포함해서 나중에 나온 본 메뉴들까지 모두 건강한 맛이었다. 아침을 거의 먹지 않은 내가 너무 배부르다 싶을 정도로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속이 부대끼거나 하진 않았다. 엄마는 2일 차에 먹었던 <고궁보말손칼국수> 집의 보말죽이 더 진하고 맛나다고 하셨지만 어쨌거나 보말죽을 되게 만족스럽게 드셨다. 여행 후에도 종종 생각난다 할 정도로 보말죽에 진심인 엄마다.
천천히 꼭꼭 씹어서 평소 양보다 더 먹었는데도 식당에서 머문 시간은 짧았다. 아직 렌터카 반납 시간까지도 많이 남았기에 카페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이때 여동생과 나의 의견이 갈렸다. 여동생은 SNS용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는 예쁜 카페를 선호하지만, 나는 이왕이면 관광도 할 수 있는 카페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은 이호테우 해수욕장으로 향하자는 데까지는 합의를 보았다. 멀리 말모양 등대를 볼 수 있고, 시간과 체력이 허락한다면 해수욕장 모래사장 위를 산책할 수도 있으며, 주변에는 카페들이 즐비했다. 이 중에 SNS용 카페를 찾으면 된다 싶어서 딱 그런 카페를 찾았는데, 공교롭게도 그곳은 내가 가자고 했던 곳이었다. 카페의 이름은 <로스트 앤 헤븐>.
카페는 차고를 개조한 듯한 인상을 주는 1층과 주문하고 커피를 픽업하는 2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여동생은 1층에서 사진 찍으며 커피를 마시자고 했지만, 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야 해서 추을 것 같은 나는 안락한 2층 실내를 추천했다. 여기도 사장님이 매우 친절하고 세심했다. 아무래도 CS교육을 하는 내 직업적 특성상 이런 부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데, 운이 좋아서 이번 여행 내내 들렸던 식당이나 카페 모두 사장님과 종업원들이 친절했다.
여동생은 카페와 1층과 2층, 2층 실내와 실외에서 모두 사진을 찍었다. 당연히 나와 엄마, 남동생도 합세해서 즐거운 추억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모래사장을 걸어보겠다는 생각은 날아가버렸다. 해수욕장을 눈으로 보기만 했지만, 저 멀리 보이는 말 모양 등대와 푸른 바다를 감상하면서 맛난 커피를 즐기고 사진도 찍고 하다 보니 시간이 후루룩 지나갔다.
주유를 하고 렌터카 오피스로 향하는 길에서 우리는 공항 근처 바닷가 쪽에 뜻밖의 멋진 공원을 발견했다. 이미 주유를 해서 더 돌아다니지는 못하고 아쉬운 마음에 그냥 눈에만 담아야 했다. 다음번 제주 여행 시에 방문할 한 곳은 확정된 순간이었다. 대중교통은 없어 보이는 곳이니 아마 그때도 남동생을 기사님으로 데려와야 할 것 같다. 공원을 뒤로하고 렌터카 오피스로 진입하는 길을 지나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마침 착륙하는 비행기를 정면으로 볼 수 있는 도로에서 '와, 이거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 장면이네!'하고 감탄하다가 길을 놓친 것이었다. 운전 중에 한눈을 팔면 큰일이지만, 마침 도로에 차도 없었고 딱 타이밍 좋게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고 착륙하는 폼을 잡았던 모습을 정면으로 본 터라 이해가 갔다. 그렇게 우리는 제주에서 기억에 남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신기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렌터카를 일찍 반납하고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별다른 할 일이 없어서 일찍 탑승구 쪽으로 가기로 했다. 이때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올 4월에 있었던 제주도 출장 때는 미처 못 본 검색대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사람도 별로 없고 편리했다. 지난번 가족여행 때도 그랬지만 이번 가족여행에도 나는 노트북을 소지했다. 김포 공항에서나 지난 출장 때의 제주 공항에서 모두 디지털 기기는 가방에서 꺼내서 검색대 바구니에 놓아야 했는데, 이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가방에 있는 상태로 검색대에 놔도 된다는 것이 아닌가! 이 얼마나 최신식이고 편리하던지. 그래서일까 다른 검색대에 비해 사람이 거의 없어서 우리는 매우 시각에 탑승구 근처까지 왔다. 할 일도 별로 없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냥 공항 내를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거나 앉아서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면서 약간의 여유를 즐겼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직항 노선이 많아서 국내에서 가장 바쁜 김포-제주 노선은 제주행일 경우는 보다 높은 고도로, 김포행일 때는 보다 낮을 고도로 다닌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제주를 떠나는 비행기 창 밖으로 펼쳐진 푸른 바다 위의 섬들이 뚜렷하게 보였다. 나는 제주 여행을 자주 다니게 되면서 비행 중 창밖 풍경에 별 감흥을 못 느꼈는데, 이번처럼 아름다운 남쪽 지방 섬들을 뚜렷이 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날씨마저 좋아서 반짝거리는 바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거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섬들도 모두 저마다의 예쁜 색을 자랑했다.
눈이 즐거운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기내 쇼핑을 시작했다. 기내에서 먹을 것과 택배로 보낼 것을 주문하고 다시 추가 주문하려는데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기내 쇼핑 시간이 종료되었다고 했다. 내가 먹기엔 너무 달긴 했지만 '우도땅콩 로쉐'가 맛나서 꼭 하나 더 구매하고 싶었는데 수다 삼매경에 놓쳤나 보다. 아쉬워하는 우리가 안쓰러웠는지 승무원 한 분이 인터넷에서도 구매할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인터넷에서 언제든 구매할 수 있다면 아쉬울 것도 없다 여겨 우린 다시 즐거운 기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비행시간이 후다닥 지나 우리는 어느새 김포 공항에 착륙해 있었다.
아주 효율적이고 빠르게 짐을 찾고 공항을 벗어난 우리는 여동생이 부른 콜밴을 타고 엄마집으로 향했다. 이제 여행이 끝났구나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데 콜밴 안에서 여동생이 엄마네 동네에 있는 사찰을 방문하자고 제안을 했다. 사실 우리 가족은 무속인의 제안으로 한 번의 큰 굿 대신, 1년 동안 한 달에 한 번 근처 절에 가서 우리 집안 조상에게 남동생을 도와달라 기도하기로 했다. 하도 남동생 일이 잘 안 풀리고 자주 아프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서 택한 방법이었다. 엄마와 나, 그리고 남동생은 벌써 두 번이나 사찰을 방문한 상태였고 세 번째는 여동생도 같이 하면 좋겠다 싶어서 제주도의 '관음사'를 여행 일정에 넣었었다. 그러나 '관음사' 일정을 수정하고, 대타였던 '선운정사'는 들어갈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여동생은 우리가 어릴 때 자주 놀러 갔던 사찰에 가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불교 신자가 아닌 우리 가족에게는 사찰보다는 약수터, 놀이터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사실은 되게 오래되고 유명한 사찰이라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하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뻔한 사실이다.
여동생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리는 엄마네 집에 캐리어들을 던져 놓고 바로 사찰로 향했다.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어서 걸어가야 했는데, 다행히 엄마의 컨디션이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좋았다. 놀랍게도 한참 경사가 진 언덕을 오를 때도 힘들어하지 않았다. 엄마가 농담조로 "제주도 약천사에서 기도해서 들어주셨나 보다"라고 할 정도였다. 놀랍게도 늘 골골대던 나조차도 컨디션이 좋아서 우리는 가뿐하게 사찰을 다녀올 수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약천사에서 기도한 것도 한몫했을 것 같고, 여행 중 많이 걸어서 나름 근육이 단련되어 효과를 본 게 아닌가 싶다.
서울에서도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여행 중인 느낌을 받았다. 아니 여행의 마무리를 잘하고 있는 중이라고 느꼈다. 다시 엄마네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 우리는 오랜만에 엄마네 동네 맛집에서 배달된 아귀찜을 맛나게 먹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두 번째 가족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에 대해 자축하며 전체적으로 여행 리뷰를 했다. 우리 가족들이 뽑은 Top 3 일정은 성산일출봉에서의 일출, 우도 해안도로 일주, 서귀포 유람선 관광이었다. 정말 뜻밖이었던 점은 그 세 가지 모두 내가 제안하고 모두가 반대해서 설득과 회유로 밀어붙인 일정들이란 것이었다. 내게는 대단히 뿌듯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다음 가족 여행은 어디로 갈까?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그때도 우리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즐겁고 행복하게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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