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발의 사전적 정의는 다시 발생함.
또는 다시 일어남이다.
나는 이 한 문장에 슬픔과 응원이
함께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재발은 슬픔이다.
하지만 그 슬픔을 딛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앞으로 총 5번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기록해보려 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재발 통보로 시작된다.
6사이클의 통원 항암이 끝나고,
식욕이 조금씩 돌아오던 무렵이었다.
정기검진에서 재발 판정을 받았다.
그때가 스물한 살.
감정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억울함이었다.
정말, 너무너무 억울했다.
내 잘못도 아닌데 아팠던 것도,
버티고 견뎠는데 또 아프다는 것도.
“전생에 나라라도 팔았나?” 이런 말이 절로 나왔다.
입에도 안 올리던 욕들이 그냥 튀어나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간은 흘렀고
살기 위해선 치료를 다시 시작해야 했다.
빠르게 입원 수속이 진행되었고,
병원 9층 암병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병동은 처음이라서
이리저리 둘러보니 내가 제일 어렸다.
애초에 20대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모, 삼촌 환자분들이 간식도 챙겨주시고,
말도 먼저 걸어주셨지만…
그 시절 나는 그 호의를 불쌍해서 그러는 줄 알고,
되려 벽을 쌓고 지냈다.
“어린 게 불쌍하네”
실제로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있어서,
내 안의 이상한 자격지심만 더 커졌던 시기였다.
검사들이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골수검사는… 정말 장난 아니었다.
교수님은 “요즘은 과거처럼 안 아파요~” 했지만,
무슨 소리.
입에 거품 물고 기절할 뻔했다.
그 이후로, 힘든 순간마다
“그래도 골수검사보단 낫잖아”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티게 됐다.
검사가 끝난 후,
본격적인 항암이 시작되었다.
부모님을 못 오게 했다.
머리 빠진 내 모습도,
“아픈 자식”이라는 타이틀도 보기 싫었다.
그리고 병원 생활 대부분도 혼자 힘으로 감당했다.
주 1회 침대 시트를 갈아주시긴 했지만
그조차 싫어 링거 꽂은 채 직접 갈곤 했다.
그 시절 나는,
누군가 나를 돕는 것 자체가 싫었다.
마치 초식동물이 된 느낌이었다.
건강한 사람은 강한 사람.
아픈 나는 약한 사람.
이 이분법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이 성격이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했다.
침상 커튼을 닫는 순간
그곳은 병원이 아니라, 내 방이 됐다.
침대 끝에 발을 탁 올리고,
노트북으로 명탐정 코난을 틀었다.
한 손으론 그날의 픽인 과자를 집어 먹는다.
이게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일상이었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선생님이 온 줄도 모를 때가 많았다.
그런 날엔 “휴가 왔냐”라고 농담을 하시기도 했다.
잘 지낸 것처럼 보여도,
항암과 부작용은 늘 함께였다.
낮의 주적은 식욕 감퇴.
암환자라면 흔히 겪는 증상이다.
항암약은 체중 대비로 투여되기 때문에
체중 유지가 중요한데 이게 정말 힘들더라.
억지로 먹으면, 다시 올라온다.
고무, 흙을 먹는다면 이런 맛이 아닐까?
밥이 밥이 아니다.
그래서 찾은 해법은 병원 특식과 간식.
그나마 이것들은 넘어갔다.
나는 어떻게든 먹으려 했다.
진짜, 악으로 깡으로 먹었다.
대표적인 일화로는
배달 족발집 사장님과 친구가 되고
중국집 배달을 병동으로 시켜 먹은 이야기가 있다.
이건 추후에 자세히 풀 예정이다.
아무튼, 그렇게 악착같이 먹고 버텨서
지금 살아 있는 거라고 믿는다.
낮이 이렇게 버티는 시간이었다면,
밤은 정말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잠이 중요하단 건 다 알지만
잠을 못 자는 고통은 겪어본 사람만 안다.
나는 항암 부작용으로 불면증을 겪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유튜브 수면 영상, 독서,
약까지 먹어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포기했다.
그 대신, 다들 잠든 밤이 되면
휴게실에서 창밖을 구경하거나
지하의 편의시설을 탐험했다.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혼자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모든 걸 다 해보았을 때,
비로소 포기라는 선택도 배웠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나를 조금 더 알게 해 주었다.
이렇게, 낮과 밤을 혼자 견디며
재발 항암이라는 새로운 파도에 천천히 익숙해져 갔다.
그 시간이 쌓여, 첫 번째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병동에서 만난
할머니들과의 사소한 충돌들,
그리고 그 속에서 조금씩 더 두터워져 갔던
마음의 벽에 대해 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