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하여
김후시딘은 분명 요 며칠 마음속에서 변화를 해내고자 하는 의지가 태동하는 기운을 느꼈지만
그 불은 비 오는 날 젖은 장작처럼 불붙기 힘든 것이다. 그는 어느새 또 술을 마신다 물론
그는 낮 밤으로 계속 마시지는 않는다 저녁에 마시는 막걸리 한 두병이 전부이고 그 이상 마실 체력도
이제는 남아 있지 않다. 그래도 그 한 두병은 그에게는 아주 소중한 친구들임에는 분명하다
지금 같은 불황기에는 대리운전도 일거리가 별로 없다.
그러니 대기시간이 길어지고 길에서 하릴없이 보내는 시간이 태반이다. 그럴수록 김후시딘의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자존감마저 땅바닥에 들러붙어 버리는 것이다 통장에 여윳돈이라도 듬뿍
있다면 자존감 따위는 무시해도 그만이겠지만 실직한 지가 2년이 다되어가고 보니 그의 자존감을
위로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조금의 술로 현실을 마비시키는 것 외에는 별 다른 방법이 없다
한 여름의 더위는 습하고 몸은 곯아서 식은땀이 셔츠를 적시고 있다. 배는 허하고 그는 또 힘이 없다
자연스럽게 발은 또 집으로 향하고 집에 와 샤워를 간단히 하고 물을 마시고 책상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니 조금은 살 것 같다 그는 철 지난 전단을 들추듯 보던 책을 몇 장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배가 슬슬 고파진다
냉장고에 있는 막걸리와 냉동실에 있는 냉동만두 그 둘의 만남을 주선해 줄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다행히 지금은 그렇게 자기 혐오감이 들지 않는다 문득 생각이 든 게 그래도 어쨌든 선은 넘지 않는
생활을 한다는 그런 생각도 한편으로는 들었던 것이다
얼음을 한 두 개 넣은 유리 글라스 잔에 막걸리를 붓고는 반정도 마신 후 만두를 간장에 찍어 입안에 넣고는
우물우물 씹어본다 그는 인간은 일단 뭐를 씹고 있으면 불만이 없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아가 음식물을 씹을 때에는 생각하는 기관이 작동을 멈추게 되는 메커니즘이 있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은 그는 그것도 연구해 볼 일이라고 생각하곤 머릿속의
어느 곳에 넣어둔다
그러다가 만두에서 나는 고기잡내와 부추향 그리고 만두피의 밀가루냄새가 연주하는 삼중주의 방문을
받을 무렵 문득 전 직장을 나올 때 동료의 질문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김 후시딘은 전직은 공무원이었다 늦은 나이에 어쩌다 말단 9급 공무원이 되었지만
3년을 조금 못 채우고 나온 것이다.
김후시딘이 면직을 이야기했을 때 다들 놀라는 눈치였지만 남일이었기에 크게 말리거나 그런 사람은 없었다
동료 한 명이 질문을 했다 "주사님 왜 그만두세요?"
김후시딘은 " 아 자유를 찾으려고요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살고 싶었졌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었다 김후시딘은 그 무렵 그 책을 겨우 읽어 내고는 충동에 시달렸던 것이다 물론 그때는
여러 가지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결국 직장을 나오게 된 건 그 못된 버릇 충동이 또 도진 것이다 무언가의
충동이 시작되면 그것이 특히 무언가로부터의 해방 그런 느낌이라면 더욱더 강렬했던 것이다
지금 김후시딘은 아주 고요하게 만두를 씹으며 곰곰이 자문해 보았다 "난 조르바처럼 살고 있는가?"
이 대목에서 그는 결국은 논리적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년의 시간과 돈은 다 사라지고 조르바도
없다 조르바는 대충 마음대로 아무 생각 없이 산 것 같지만 그는 부질없는 꿈이라도 목표가 있었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후시딘은 생각해 보니 부질없는 목표도 없었고 내일을 수시로 걱정했다
걱정은 원래 변화를 위한 행동을 유발하는 촉매제 아닌가 그에게는 아닌 것이다 걱정은 그의 심연을 흔들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한다. 그와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단단한 벽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조르바 부불리나 레모니 선장 그 지식인 김 후시딘은 머릿속에서 그 책의 인물들을 생각해 본다 그 새벽 바다
럼주를 마시며 바다를 보는 광경을 생각해 본다 포말이 이는 파도며, 아침 바다에 노르스름한 태양이 계란 노른자처럼 떠올라 사람들의 얼굴에 빛을 선물하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은 조금은 현실을 외면할 수 있는 즐거움을 주니까 말이다 특히 레모니
조르바가 산투르를 연주하듯 그도 악기나 하나 배워둘걸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고독한 자에겐 악기만 한 친구가 있겠나 싶다 물론 현대인들은 휴대폰 속에 명령만 내리면 요술램프 지니처럼
다양한 악기와 음악이 연주되는 시대이긴 하지만 손가락 끝과 악기가 만나 교감하는 그런 것들에 신경을 내주다 보면 거기에서만 오는 즐거움은 따로 있을 거란 생각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은 식은 만두가 눅눅히 그를 바라보고 있고 간장은 바닥이 말라버린 검은 강바닥처럼 보인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시작은 언제나 찬란하고 끝은 항상 흉흉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생각이 든다 사랑이든 요리든 뭐든 말이다 "끝을 아름답게 하는 연습도 해두어야겠지 "라고는 중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