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꿈이야기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밤늦게 잠들었다 정오가 다 될 즈음 그는 눈을 뜬다
열어둔 베란다 밖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그는 이런 날씨를 좋아한다
비가 오고 흐린 날 말이다 김후시딘은 아무래도 술에 의해 잠을 청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으로 근처의 작은 가정의학과를 방문한다
이곳은 마치 오래된 드라마에서 본 70년대
분위기의 세트장 같다 마치 장발을 한 의사와 굵은 카라셔츠를 입은
환자들이 득실댈 것 같은 느낌이다
시내의 중심부에 있는 병원들과는 다른 세상인 것이다
오래된 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상가에 위치한 작은 의원인데 의사 선생님은 모든 과목을 진료하신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체크무늬 상의를 입은 의사가 말한다
" 무슨 일로 오셨나요?"
눈빛에서는 약간의 조급 한듯한 느낌을 그에게 주고 있다.
김후시딘은 말한다
"아.. 아., 저기 그러니까 제가 술을 조금 마시면 곧 잠들긴 하는데 깊게 못 자고
깨어나면 우울한 기분도 많이 들고 그렇습니다 수면제를 처방받을 수 있을까요?"
의사가 대답한다
" 언제부터 그러셨어요?"
김후시딘이 말한다
"술에 의해 잠든 건 아주 오래되긴 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니까요 다행히 중독이거나 그런 건
아닌 건 같은데 의존경향은 조금 있습니다 술을 안 마시고 잠을 자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의사가 답한다
"일단 수면제를 5일 치 처방해 드릴 테니 드시고 다시 오세요"
의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용건을 마친다는 듯이 빠른 속도로 눈빛을 거둬 모니터 속으로 떠나 버린다
김후시딘은 옆에 있는 약국에서 약을 처방받아서 나온다
약사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며 묻는다 " 잠을 잘 못 자시나 봐요?"
"네 술을 마시면 조금 자긴 하는데 안 그러면 잘 못 자서요"
"낮에는 조금 주무시나요?"
"네 낮에 주로 조금 자긴 합니다"
"그러면 불면증은 아니실 겁니다 식사 잘 드시고
주무시기 전에 한알씩 드시고 주무세요"
약사가 건네준 투명 지퍼백봉지에는 아주 작은 알갱이 같은 약 5알이 들어 있다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니 조금 넉넉히 주지 이거 며칠 먹으면 없겠네..."
"안녕히 가세요" 약사는 잠시 그의 쪽으로 눈길을 주고는 인사를 건넨다
비는 퍼붓는 것도 아니고 아주 약하게도 아니고 당연히 해야 할 작업을 하듯 쉬지 않고 부지런히 내린다
김후시딘은 집에 와 베란다를 열고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보고 있다.
그는 생각한다 아무래도 자신의 상태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다는 어두운 기분을
어떻게 하기가 힘들어진다 수면제를 한 알 먹고 일단 잠을 좀 더 자보기로 한다
그는 또 생각에 잠긴다 대체 왜 사는 걸까? 삶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 젊은 시절 고민했던 이야기를 낡은 서랍에서 꺼내 다시 주무르듯 생각해 본다
무슨 미련이 남은 거야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아니면 보고 싶은 거라도?
너에게 슬픔과 고통을 주는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하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뭐 돈 벌어서 하고 싶은 거라도 있는 거야?
부귀와 명예 다 부질없는 거 이미 알만큼 알 텐데 아니면
고양이처럼 안락한 박스 같은 몸을 숨길만한
집 한 채라도 가지고 그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싶은 건가?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혼잣말들을 도미노 세우듯 세우다가 어느새
말들의 도미노 첫 줄을 출발시키고는 빗소리와 함께 잠이 들었다
급하게 누군가가 집대문을 두드린다 쾅쾅쾅 쾅쾅쾅~~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정신검색부 검색요원입니다"
김후시딘은 불쾌한 기분에 깨어 현관 쪽으로 나간다
그는 문을 열고 "네 뭐라고요 누구시라고요?"라고 말한다
"정신검색부 정기 검사기간입니다 간략히 묻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 때문에 살고 계신가요?"
"네? " 그는 잠시 황당한 질문에 말문이 막혔지만 딱히 대답할 분명한 이유가 없음을 알고 순순히 체념한다
"당신은 삶의 이유를 소명하지 못했으므로 정신건강법 2조 2항에 의해 비자발적
격리 3개월에 처해질 것입니다"
뒤에 있던 정신검색부 소속요원 둘이 그의 입에 거즈를 대는 순간 의식을 잃고 기절하고 말았다.
삶의 나침판이 없는 사실이 탄로 나 정신개조수용소에 감금되게 되는 것이다.
사막 한가운데나 태평양 한가운데서는 나침판이 없으면 불안하듯 그는 지금 나침판을 분실한 것이다.
김후시딘은 축축하게 젖은 등줄기에 잠을 깨 멍하니 생각한다
무슨 요원들이 나를 체포하러 온 것 같던데... 라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비는 점점 굵어지며 베란다 큰 창을 세차게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