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이 거울을 닦은 이유
절망에 빠지면 큰 일이다. 긴 설명 필요없이 절망의 늪 속으로 더 깊이 빠져 들기 전에 빨리 빠져 나와야 한다. 문제는 절망에 빠진 사람은 대개 긍정적인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긍정적이다 못해 초긍정 자체다. 초긍정으로 인해 자신을 보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절망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
한 중학생이 노려 보면서 화난 얼굴로 고함지르며 선생님을 가로 막고 있다. 이 장면만 본다면 선생님에게 무례한 학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실상은 다르다. 수업시간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한 학생을 구타하는 선생님의 폭력을 한 용감한 중학생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맞을 수 있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용기를 내었다. 이 용감한 중학생은 같은 반 친구가 별다른 이유없이 선생님에게 무차별 폭력을 당하는 상황에서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어 선생님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소리지른 것이었다. 이런 특정 상황과 조건을 모두 알지 못하면 용감한 행동을 한 학생을 이해하기 힘들다. 일부 상황과 특정 조건만 편집해서 본다면 학생은 선생님에게 무례한 학생이 되어 버린다.
한 남자가 남루한 집 단칸방에 사는 부하 직원의 집을 찾아가 꽤 많은 현금이 든 봉투를 주는 장면을 당신이 보았다면 생활이 어려운 동료를 위하는 선한 사람의 행동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남자는 직장 부하직원을 술자리 모임에서 폭행한 뒤 합의금 명목으로 주는 것이었다. 상황과 조건을 모두 파악하지 않고 판단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가지 경우의 모든 상황과 행동의 조건을 목격하고 알고 있는 같은 반 학생들, 직장 동료들은 용감한 학생과 비열한 남자의 행동의 의미를 안다. 지나가는 사람이 만약 행동만 보고는 알 수 없고 오해하기 쉽다. 행동의 조건까지 알면 조금 이해될 듯 하지만 부족하고 무슨 우여곡절이 있었는지 궁금해 진다. 여전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 행동의 조건에 그 조건을 만든 상황까지 알아야 비로소 확실하게 이해가 된다. 목격한 상황과 조건이 모두 주어져야만 친구 학생과 직장 동료를 판단할 수 있다.
자아는 자신이 직접 볼 수 없다. 타인의 모습을 통해 거울처럼 비춰볼 수 있을 뿐이다. 상황과 특정 조건이 다름 아닌 바로 그 학생과 그 남자의 자아가 되는 것이다. 상황도 여럿이고 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행동의 조건이 또 다르므로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과 조건의 조합은 무수하다. 당신의 자아가 궁금하다면 모든 상황과 상황의 구체적인 조건에 반응한 당신을 바라본 타인의 모습에서 확인 가능하다.
그런데 상황과 상황의 조건이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판단해서 하는 행동이 항상 동일하다면 무슨 경우인가? 조금은 극단적인 예지만 돈 벌고 이익이 생기는 일이라면 어떤 상황이라도 관계없고 조건이 아무리 바꿔도 하는 행동이 같다면 그 사람의 자아는 딱 한가지만 있는 것이다. 모든 경우의 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동에 초”긍정적”이다. 오직 하나의 목표만 있으니 초긍정이고 다른 모든 것에는 아예 희망을 두지 않고 잘라 버린 절망을 택한 긍정이다. 극단적인 예라고 했지만 돈 뿐 아니라 권력 앞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절망적으로 긍정하는지 목격하는 것 어렵지 않다. 돈과 권력 앞에서 초긍정하는 절망적인 이런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결코 보지 못한다. 오직 이를 보고 있는 타인만이 본다.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모습에서 자아를 볼 수 있음에도 초긍정 인물들은 자아를 볼 생각이 없다.
말이 길었지만 처음 한 질문 “어떻게 절망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의 답은 간단하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보기만 하면 된다. 거울은 타인이다. 거울에는 자신이 한 행동의 조건과 상황을 바라본 타인의 모습이 보인다. 제대로 거울을 보면 “앗 내 모습이 저랬어?” 하고 실망하게 되고, 긍정 자아에 실망하면 비로소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올 실마리가 잡힌다.
윤동주 시인이 녹슨 거울을 왜 그리 닦고 또 닦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