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는 다름을 표시하는 도구일 뿐이다
디지털 기술에서 ‘0’과 ‘1’을 만든 것은 이를 합쳐 세상 모든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숫자, 단어, 모습, 의미, 개념 등을 0과 1만으로 모두 나타낼 수 있다. 무한한 능력이긴 하지만 0과 1은 능력 자체가 아니라 능력이 실현되기 위한 도구다. 철저하게 그래야 한다.
컴퓨터 과학에서의 도구 0과 1이, 삶과 죽음, 생명의 영역으로 넘어오면 ‘음’과 ‘양’이 된다. 하지만 그 표기가 달라졌을 뿐 음과 양을 합쳐 모든 삶과 죽음, 모든 생명을 표현하는 도구임에는 다름이 없다. 또한 없어야 한다.
있음이 강조되어 극단으로 치달으면 권력이 되기도 한다. 이는 상징이 될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가부장’이다. 가부장 권력의 표상으로 ‘아버지’가 있다. 착하디 착한 혹은 연약한 현실의 아버지가 아닌 상징 언어 세계 속 아버지, 즉, ‘가부장’ 말이다. 말 그대로 다분히 상징이다. 음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가부장 상징과 대비되는 ‘자연’이란 게 있다.
가부장 권력, 자연이란 추상은 남성, 여성으로 치환될 수 없다. 남성 속에 가부장 권력과 자연이 있을 수 있듯이 여성 속에도 마찬가지다. 남성은 곧 가부장 권력, 여성은 자연, 이런 식으로 단순 치환하면 낭패가 생긴다.
페미니즘의 본질은 ‘음’과 ‘양’을 올바로 이해하고 사용하자는 철학적 움직임이다. ‘음’을 ‘여성’으로, ‘양’을 ‘남성’으로 오해한 후에 남성이 여성을, 또는 여성이 남성을 지배한다는 논리를 극복하려는 철학이 페미니즘이다. 비단 양과 음이 남성과 여성에만 적용되지 않는다고 페미니즘은 이해한다. 인간과 동물, 생물과 무생물, 사람과 로봇 등의 관계에서도 한 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고 주도한다는 생각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을 페미니즘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