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야끼
식구끼리 모여 앉아 저녁을 함께 먹는 일에 큰 의미를 두셨던 아버지는 밥을 먹는 내내 이런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여러 번 강조해서 이야기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뭐 하나 싫어할 일이 아니었건만 그때는 조용하게 밥 먹는 게 소원이었고 청소년기부터는 친구들과의 약속 때문에 이런저런 핑곗거리를 대다가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저녁은 늘 집에서 준비했는데 그때는 지금처럼 외식이 일반적이지도, 갈만한 식당이 많지도 않던 때였다. 생각해 보면 참 많은 밥을 식구들과 먹었는데도 그에 비해 떠오르는 음식은 많지 않다. 그 가운데 하나는 ‘스키야끼’라는 일본식 요리다. 일제 강점기의 영향으로 일본말인 줄 모르고 쓰는 말들이 많아 ‘스키야끼’가 일본 요리인 줄은 한참 뒤에 알았다. 휴대용 가스버너가 나오기 전이라 이 요리를 먹을 때는 곤로를 방 한가운데 놓고 먹었는데, 즉 끓이면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즉석요리였다. 그 점이 뭔가 특별한 음식이라는 걸 말해줬고 끓이면서 먹었으니 당연히 맛도 좋았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날달걀을 풀은 앞접시를 앞에 놓고 소고기와 두부, 채소 등을 찍어 먹는 거였다. 평소에 익히지 않은 달걀을 먹는 건 아버지뿐이었다. 마치 보약이라도 드리는 것처럼 아침마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젓가락과 달걀을 드렸는데 달걀에 구멍 두 개를 뚫어 후루룩 먹는 모습은 의식과도 같은 아침 풍경이었다.
스키야끼는 샤브샤브용 고기보다 조금 두껍게 썬 소고기를 구워 날달걀에 찍어 먹는 음식인데 달걀에 적셔 먹어서 고기의 맛이 더 고소했다. 엄마는 단골정육점이 있어서 고기 잡는 날을 미리 알고 스키야끼용 고기를 사 오셨고 간혹 생간을 받아 오기도 했다. 아버지는 달걀만이 아니라 간도 날것으로 드셨는데 어릴 때는 어른들은 다 그렇게 먹는 줄만 알았다. 당연히 우리에게는 익힌 간을 주셨는데 익히기 전, 보기에 무시무시한 시뻘건 간이 익으면 이렇게 고소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스키야끼를 먹는 날은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으니 은근 기다리는 날이었고 고기뿐만 아니라 두부나 배추 등 채소도 곁들여서 맛있게 먹었다.
이 음식과 함께 떠오르는 또 다른 기억 하나, ‘스키야끼’를 먹은 어느 저녁, 둘째 언니가 엄마를 모시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러 극장에 갔다. 그래서 아버지와 내가 설거지를 했는데, 믿기 어렵겠지만 그때는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이 돌던 때라 아버지가 설거지한다는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아주 큰 사건이었다. 엄마가 영화를 보러 간 것보다 더.
결혼한 뒤에는 이 음식을 해 먹은 적이 없고 ‘샤브샤브’ 전문점은 많아졌지만 ‘스키야끼’를 파는 집은 보지 못해 자연스럽게 잊었는데, 어느 날 지인들과 간 일본식 술집 메뉴에서 ‘스키야끼’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떠올랐다. 잊힌 줄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금은 자주 먹는 음식이 아니지만 가끔은 별다른 이유 없이 아버지처럼 글라스에 담긴 소주에 ‘스키야끼’를 먹고 싶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