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네 감자 캐는 날

by 별바라기
2022년 7월 2일의 감자 밭

올해도 감자의 계절이 돌아왔다.

시퍼렇게 시원함을 보여주던 싱싱하던 감자 싹들이 덥다고 시위하듯 누렇게 시들어가기 시작했는지 장마 소식과 일기예보에 촉을 세우고 계시던 친정엄마가 이번 주를 감자 캐는 날로 선포하셨다.

반백 년에 가깝게 감자 농사를 짓는 것을 보고, 캐고, 맛보고 있는 나는, 아무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진 않지만 감자 캐는 기술이 해마다 늘고 있는 를 쓰담 쓰담할 뿐이다.


어린날의 나는 감자밭에 있다.

오늘은 할머니, 부모님, 우리 사 남매가 이른 아침을 먹고 감자밭에 나와 수확을 돕고 있고, 며칠째 긴 장마가 올 거라는 9시 뉴스의 일기예보와는 달리 아직 비는 오지 않고 있지만 점점 더 뜨거워지는 햇살에 감자 밭을 비워야 그다음 농작물을 심고, 자랄 수 있기에 차일피일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감자 가족을 덮고 있던 비닐을 걷어 주시고 나와 동생은 감자 싹 뽑는 일을, 할머니와 언니는 밭고랑에 앉아 땅속에 부끄러운 듯 숨어 있는 감자를 호미로 살살살살 간지럽혀 꺼내고 있고, 막내는 소복하게 모여지는 감자들을 큰 감자, 작은 감자 크기별로 고무 대야에 담고 있었다.


"어이구야 오늘 이 밭엔 일꾼이 많네. 후딱 캐겠는걸?"


지게를 지고 지나시던 유씨네 아저씨가 우리 가족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형님 뭐하러 가요?"


"비오기 전에 소꼴 좀 비다 놓을라고, 올해 감자 농사 잘 짓네. 씨알이 굵어"


"형님넨 언제 캐요?"


"우린 몇 고랑 심지 않아서 캐고 자시고 할 것도 읍어. 어제 벌써 다 해치웠는걸 뭐"


아저씨는 아빠와 몇 마디 나누고 싱싱한 쇠꼴을 베러 숲을 향해 걸어가셨다.

이 많은 감자는 언제 캘까 하노니

고사리 같은 손이나마 열심히 거든 덕분에 감자 수확은 일찍 끝났다. 가마니 가마니에 담긴 감자는 리어카에 싣고 대문간 옆 헛간으로 옮겨졌고, 엄마는 내년에 씨감자 용과 반찬으로 졸여 먹을 작은 감자는 따로 모아 놓으셨다.


수돗가에는 내가 호미로 캐다가 찍어버린 감자가 바가지에 한가득 담겨 있고 할머니는 반쯤 닳아 없어진 요술 숟가락을 들고 감자 껍질을 벗기고 계신다.

내가 '할머니의 요술 숟가락'이라 부르는 누런색을 띤 놋숟가락은 내가 이 집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기억이란 게 있을 때부터 펌프 곁에, 수돗가에 놓여 있었으니 적어도 열 살은 넘었을 숟가락인데 밭에서 산에서 마구잡이로 캐고 뽑아온, '도대체 이것이 손질이나 될까?' 걱정의 맘과 깝깝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갖가지 뿌리들을 기가 막히게 환골탈태를 시켜 주어 '할머니의 요술 숟가락'이라 불렀었다. 감자는 물론 도라지나 더덕, 토란, 생강, 그리고 커다란 무까지 할머니의 손을 거치면 볼품없던 아이들이 하얗게 노랗게 좋은 향도 내며 짜잔 변신해 있었고, 쓸 때는 몰랐는데 한 참 뒤에 보면 조금씩 줄어드는 숟가락 크기가 어쩌면 환골탈태를 부르는 요술의 힘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했었다.


할머니가 요술 숟가락으로 수돗가에서 요술을 부리신 덕분에 그날 저녁에 엄마는 노오란 빛을 띤 통감자가 얹혀 있는 뜨거운 감자밥을 해 주셨고, 할머니는 다른 날 보다 유독 식사를 맛있게 하셨다.


"할머이 감자가 그래 맛있어?"


"나는 불에 구운 게 더 맛있는데"


"낼 꾸줄게"


기대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약속에 환한 웃음으로 신남을 표현한 나는 포슬포슬 분이 나는 뜨거운 감자를 할머니처럼 숟가락으로 떠서 호호 불며 먹었다.



"올해는 가물어서 작년만큼 알이 굵지가 않네"


로컬 매장에 감자를 납품할 기대가 있으시던 친정엄마의 기운 없는 목소리에


"이래 야물게 큰 감자가 분도 더 잘나고 맛있자네"


아빠가 엄마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셨다.


올해의 감자밭엔 어린 우리들을 대신하는 막냇동생의 초등학생 아들들이, 나의 할머니를 대신하여 우리 엄마가 할머니란 이름으로 어린 손주들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감자를 캐고 계신다. 조카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뜨거워지는 태양의 공격에 감자 캐는 재미는 금세 시들해졌고 그 찰나 감자 싹을 들어 올리다 드러난 개미집을 관찰하느라 정신이 없다.


"형, 일개미 부대가 알을 물고 굴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여왕개미가 보고 싶은데 저 개미들을 따라 땅굴을 더 파야할까?"


참 신기하기도 하지. 호기심이란 단어로 묶어 버리기엔 뭔가 좀 아쉽고, 그렇다고 내가 낳은 조카들도 아닌데 이 묘하게 닮아 있는 이런 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냥 유전자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 강산이 네 번 가까이 변할 시간만큼 나이 차이가 있는 조카와 어린 내가 했던 행동이 저렇게 똑같을 수가?

맨발에 신은 슬리퍼 위로 공격하듯 올라오는 개미들의 공격에 기겁하며 쫓으면서도 눈은 알을 물고 가는 개미떼를 놓치지 않으려, 들고 있는 호미로 땅을 팔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큰 조카의 모습을 보면서 이래서 유전의 힘이 어마 무시하고 무섭다고 하는 것인가? 새삼 느끼며 키득거리고 웃었다.


진정한 여름을 알리는 7월을 연 태양도 뜨겁지만, 그 덕분에 간간이 이마에 느껴지는, 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바람이 더없이 고맙기만 하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OO이가 감자를 캘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준대요"


내가 동요에 조카 이름을 넣어 부르자


"에 고모, 그거 그렇게 부르는 거 아니잖아요?"


"아니 맞아, 고모 학교 다닐 땐 이렇게 불렀어"


"에잇 아닌 거 같은데"


"에잇 맞는데 맞는데"


친정에서 얻어 온감자로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감자밥을 나도 식구들에게 맛 보여 주려고 맘은 먹었는데 감자 껍질을 숟가락으로 벗길 시간이 없어 내일로 내일로 미루고 있다. 이번 주말에는 꼭 시도할 수 있길 바라며, 올해도 감자를 잘 품어준 밭과, 바람을 보내준 산과, 다 캘 때까지 기다려준 빗줄기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keyword
이전 13화야나할머니네 빨랫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