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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Aug 13. 2022

야나할머니의 된장 바르던 날

길을 걷다가 나팔꽃 속에서 열심히 꿀을 따고 있는 꿀벌을 보았다.


"옴마나 얘 며칠 빗속에 영업 못해서 비 그치자마자 일하러 나왔나 봐"


"남의 영업 방해하지 말고 얼른 오셩"


"나 사진 한 번만 찍고"


"것 참 어찌 갈수록 더 산만해지나?"


"내가 원래 산~만하잖아. 어떻게 산에 쥐도 새도 모르게 매장되어 볼래?"


항상 나란히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인데 밖에만 나오면 천방지축 일곱 살 꼬마애처럼 산만하게 주변을 살피며 신나 하는 나를 보면서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아니 내가 반가워서 그래. 반가워서. 꿀벌이 사라져서 난리라는데 우리 동네엔 아직 꿀벌이 있잖아. 얼마나 다행이야"


"조만간 벌도 친다고 하겠네"


"노노 나는 벌은 좋아하지만 벌침은 좋아하지 않아. 무서워"


"벌 무서운 거 모르는 사람들이 쏘이는 거야"


"근데 당신은 벌에 쏘여봤어?"


"당연하지. 당신은 안 쏘여봤어?"


"응, 나는 한 번도"


"엥? 진짜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왜 내가 벌에 쏘여봤을 거라 장담하는 거지?"


"그간 장모님 제보와 브런치 글을 봐도 엄청 쏘다녔던 거 같은데 어떻게 벌은 피해 갔을까?"


"그건 내가 착해서 벌도 피해 간 거지"


"꽃이 아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근데 이거 이거 칭찬은 아닌 거 같은데?"


"아니지 우리 색시는 꽃이 맞지. 저어기 당신 있네"


"어디 어디?, 아니 이쏴람이"


거기엔 누군가가 심어두어 뻗어 나간 호박 덩굴에 호박꽃이 노란 별처럼 피어 있었다.


"벌하고 호박꽃 하니깐 생각 나는 일이 있네. 당신은 호박꽃에 벌 가두는 장난 안 했었어?"


"왜 안 해. 했지."


"내가 어설프게 벌 잡는 거 가르치는 바람에 막내 잡을 뻔했잖아. 벌에 쏘여서"


"처남이? 어떻게 됐는데?"


"뭐 어떻게 돼. 앞이 안 보일 만큼 눈이 띵띵 부었지"


"얼굴을 쏘인 거야? 클 날뻔 했네. 귀한 아들 탈 날까봐 집이 들썩했겠구먼"


"들썩했지. 나는 엄청 쫄았고. 유치원도 며칠 못 갔었어"


나를 닮았다고 남편이 콕 집어 말한 꽃

귀가 찢어질 정도로 우는 매미의 계절이 오면 담벼락과 뒤꼍에는 할머니와 엄마가 심어 놓으신 호박 덩굴이 쭉쭉 뻗어 나갔다. 호박꽃은 피고 지며 주먹만 한 호박에서부터 나이 든 늙은 호박까지 키워냈고 여름날 어른들은 연한 호박잎을 따다가 껍질을 벗기고 쪄서 쌈으로 드시기도 했는데 나는 호박잎의 거친 느낌과 특유의 향이 거북해 입엔 대지도 않는 편식쟁이였다. 그래도 호박잎 쌈을 싸 먹을 땐 언제나 맛있는 쌈장이 따라다녀서 나는 호박잎이 올라오는 식탁은 언제나 좋았다.


호박꽃이 노란 별처럼 쫙 면 꿀벌들과 호박벌이 마실을 종종 왔는데 나는 꿀을 모으는 영업에 정신이 팔린 벌들을 호박꽃 속에 순식간에 가뒀다. 뭉그적뭉그적거리면 절대 안 되고 다섯 개의 꽃잎을 하나, 둘, 셋! 하고 한꺼번에 오므려야 벌에 쏘이는 낭패를 면할 수 있었는데 영업을 하다 갑자기 꽃에 갇힌 벌들은 붕붕, 윙윙 소리를 내며 탈출을 하려고 안간힘을 썼고 나는 다시 하나, 둘, 셋! 을 센 다음 손을 펼치면 오므려졌던 호박꽃이 쫘악 벌어지면서 벌은 휑하고 하늘로 날아갔다. 그때 절대 지켜야 할 철칙이 있었는데 그건 벌에 쏘이지 않으려면 손을 놓자마자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일이었고, 정신없이 달아나던 벌들은 나를 보지 못한 채 멀리멀리 날아갔다.


내가 호박 덩굴 앞에서 아까부터 머물며 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을 보신 할머니는  


"마한 것, 호박 달리게 가마이 냅두지. 고마해라 꽃 떨어진다."


하시며 나무라셨고


"꽃 안 떨어지게 잘했어"


라고 말대꾸를 했지만 사실 꽃도 떨어지고 탁구공 만한 호박도 한 개 떨어졌다.


하교 후 마당에 들어서면서부터 집안 분위기가 뭔가 쎄한 촉이 본능적으로 다가왔다.

'뭐지? 이 암울한 기운은?'

마루에 책가방을 내려놓고야 그 이유를 알았다.

막냇동생이 띵띵 부은 눈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손으로 더듬더듬 벽을 만지며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야 니 왜 이라나? 그리고 그 이마에 발른건 뭐대"


"짠 누나나? 나 벌이 깨물었어. 그리고 이건 할머이가 된장 발라줬어"


"니 우째다가 벌에 쏘였는데?"


"누나처럼 호박꽃 이렇게 이렇게 하다가"


동생이 다섯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나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나는 동생 이마에 발라져 있는 누런 된장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유치원에 다녀와 심심했던 동생은 하필 담장에 새롭게 핀 호박꽃과 때마침 그 속에서 열심히 영업 중이던 벌을 발견했다. 쓸데없는 교육을 시킨 엉뚱한 둘째 누나 때문에 동생의 호기심은 그날 꿀벌의 화를 돋웠고 납작 엎드려야 했던 과정을 잊은 채 손을 놓고 멀뚱멀뚱 서 있으니 닫혔다 열린 호박꽃에서 탈출해 날아가던 벌이 동생 머리에 와서 부딪혔고 놀란 벌은 동생 이마에 봉침을 쏘고 운명을 한 것이었다.


"엄청 아팠지?"


"주사처럼 따꼼해. 근데 할머이가 벌침 빼고 된장이 약이라고 발라줬는데 진짜 안 아파졌어."


나는 할머니가 동생 이마에 발라두신 된장이 너무도 웃겼지만 동생의 안쓰러운 얼굴에 감히 웃을 수는 없었다. 동생은 떠지지 않는 눈 때문에 며칠 유치원에 가지 못했고 그 뒤로 나도 동생도 다시는 호박꽃에 벌을 가두지 않았다.


분양 마감 임박! 어서어서 오세요

남편에게 호박꽃으로 시작해 된장으로 끝난 얘기를 해주다 보니 꽤 많은 거리를 걷게 되었고 그 길의 끝자락에서 열심히 집을 증축하고 있는 벌 부대를 만났다. 무서워서 가까이 갈 순 없었지만 언뜻 봐도 내가 아는 벌도 아니어서 덜컥 겁이 났다. 벌집의 크기도 저만하면 꽤 큰 듯 보였고 보이지 않는 부분에 얼마 큼의 벌이 더 숨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신고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우리보다 앞서 벌집을 발견하신 아저씨가 119에 신고 전화를 걸고 계신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조심조심 그 곁을 지나왔다.


그 뒤로 산에 다녀오시던 할머니나 아빠는 벌에 쏘이시는 일이 있으셨는데 할머니는 그때마다 된장을 바르셨다. 의학적으로 무슨 도움이 될까? 자라면서 늘 의구심은 있었지만 인터넷이 보급되고 검색을 통해 알게 된 것은 된장이 발효되는 과정에서 항암, 항독소 성분이 생성되는데 벌침에 묻어 있는 독을 중화시켜 해독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어떻게 아셨던 것일까? 병원에 갈 수 없던 그 시절 민간요법으로 이겨 내고자 했던 어른들의 지혜는 정말 알면 알수록 신기하기 그지없다.


어제 다시 찾은 사진 속에 벌집이 있던 그곳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벌은 늘 집을 짓던 곳에 지으려고 하는 습성이 있는데 119에서 걸어둔 뭔가 강력한 마법 덕분이었는지 근처를 기웃거리는 벌은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곧 추석을 앞두고 조상들의 묘를 돌볼 금초객들이 산을 찾을 것이고 나도 남편을 따라 갈고리와 톱을 들고 산에 오를 것이다. 뱀도 무섭지만 벌도 무섭고 멧돼지도 무섭고. 하아... 점점 무서운 게 많아지니 이것 또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무서움과 두려움이 있으면 좀 더 긴장하고 조심할 것이니 천방지축 아지매인 나에겐 독보다는 득이 될 것임은 틀림없고, 매해 이 즈음이 되면 뉴스를 통해 예초기나 벌 쏘임 사고를 접하게 되는데 올해는 그런 뉴스를 한 건도 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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