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목차: 에어픽션-방백의 놀이]
♬ 독백과 대화 사이
♬ 대화, 독백, 방백은 연극의 요소다
♬ 일상생활에서 방백의 양상
♬ 이것도 방백이다
♬ 연예인이 방백을 한다면
♬ 지인끼리 온라인에서 쓰는 암호
♬ 복화술
♬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방백의 기초적 유형
♬ 오프라인 방백의 예1
♬ 오프라인 방백의 예2
♬ 온라인 방백
♬ 개인 간의 온라인 방백
♬ 방백의 존재를 깨닫다
♬ 미친 우연
♬ 놀랍도록 기막힌 우연
♬ 방백의 덫
♬ 방백의 놀이
♬ 방백의 유통을 엄밀하게 증명하지 않아도
[소개글]
- 이 내용은 사실 커뮤니케이션의 유형을 분류하던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14년 전쯤으로 실제로 핵심적으로 짧은 내용은 <웹 시대의 지성>에 덧글처럼 넣었는데, (생략) 이제 이런 유형의 소통은 트위터와 같은 데서는 일상이 되었고, (생략) 기대와는 달리, 이 소통 유형을 정교하게 서술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고, 미신적으로, 부정확하게 체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생략) 그 과정에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될 것도 있었고, 거쳤기 때문에 배운 것도 있었다. (더보기)
♬ 놀랍도록 기막힌 우연
예전에는 놀랍도록 기막힌 우연을 우연이라 받아들이지 못하여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리고 그런 것을 겪으며 아주 고집스럽게 관찰한 결과 정말로 그런 무시무시한 우연은 겹치기 마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너무도 상시적인, 놀랍도록 기막힌 우연의 겹침은 있다. 심지어 일상적이기까지 하다.
그 우연은 정말로 필연이라고 여겨야 할 만큼 여러 번 겹치기도 한다. 아니, 겹치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마치 신이 의도한 필연인 것처럼. 마치 그 우연의 행렬만으로도 (적어도 인간은 아니더라도) 신만은 의도했다고 믿어야 합리적일 정도로 대단해보였다.
더구나 이런 우연은 단순히 우연만으로 결집되지 않는다. 만일 우연만으로만 연결된다면 '순전히 우연'으로 규정하기 좋지만, 실제로는 의도했거나 필연적인 어떤 생각을 얘기하는 과정에서 우연적인 요소가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우연이 필연이라는 갑옷을 입고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속삭이게 된다. 그렇게 언뜻 방백에는 수많은 우연적 요소와 필연적 요소가 겹쳐 흐른다.
우리에겐 확증편향에 쉽게 빠지는 속성이 있다. 뭔가 믿는 순간 그것과 관련되어 순방향적인 정보가 더 잘 흡수되는 것이다. 그것이 더 심해져 자신에게 무언가 말을 걸어온다고 믿는다면 편집증적이라 할 수 있다. 그건 마치 신앙의 속성 같다. 신앙에서 숭고함과 이타성만 뺀다면 그것은 병적인 속성만 남는다. 그렇다. 우리에게 신의 목소리는 때로는 진실이기도 하지만, 세속의 눈으로 보면, 확증편향의 인간적 속성과도 관련 있다.
오늘 어떤 갈구를 하면서 기도를 하였을 때 그날 목사의 설교로 그 답변을 듣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이런 맥락으로도 설명해볼 수 있다. 신앙의 논리로 우연은 필연을 덧입기도 한다.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임에도, 그렇게 여길 수 없는 것이다. 신의 방백으로 인간의 착각을 합리화한 것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신은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소통을 위해 방백을 별로 즐기지 않았다. 부득이하게 이 소통 유형은 매우 빈번하게 쓰일 수밖에 없지만 나는 언제나 명징하게 대상을 드러낸다. 내용도 설령 돌려 말하더라도 빗대거나 비유하여 말하지 않는다. 아니다. 빗대서 말하는 경우는 간혹 있다.
그러나 너무 복잡하게 꼬아 놓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직접 바로 보고 말하는 그런 유의 진짜 대화를 원할 때가 많다. 그저 방백은 자가 비평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뿐이다.
방백으로 내 감정을 이입하여 은근한 비난, 은근한 분노를 표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오히려 그런 오해를 살까 봐 자료를 검열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도 방백은 늘 의도치 않은 시선의 얽매임과 관련되므로, 그냥 신경을 끄는 게 좋을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