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정신을 놓고있다가 눈을 들어보니 얼음을 가득채운 콜라 한잔이 놓여있다.
“이거...”
그 애,A였다.순간,창문을 등지고 그 자리에 서 있던 A가 반짝,하고 하얗게 빛났다.마치 온몸으로 빛을 뿜듯이 이 텅 빈 공간안에서 기기묘묘한 존재감을 드러내듯,하얗게.또다시 번개였다.A가 한 손에 들려있던 콜라잔을 놓고 슬그머니 맞은편에 앉았다.가까이서 본 A는 나보다 두세살은 위일 것 같기도, 몇살 훌쩍 아래로 보이기도 했다.그의 바다빛 티셔츠엔 골든 리트리버 한마리가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 방금 마른번개 ..친 거 봤어요?”“요즘에 저런 번개가 많이 쳐서 대형 산불도 많이 나고 그러잖아요” 살짝 저음의,온 몸 구르기를 하듯 부드러운 목소리.창밖으로 시선을 잠시 돌리며 A는 자기몫의 콜라를 한모금 쭉 빨아마셨다.나는 산불 어쩌구 하는 이 아이의 말이 너무 엉뚱해 피식,웃음이 났지만 드러날 정도의 표정을 짓진 않았다.
“혹시 콜라 안 드세요? 그럼 아.아로?근데 .. 지금 12시가 다돼가요.잘 시간인데 커피 괜찮아요?난 커피를 못마시거든요.가슴이 너무 두근거려.하하”가슴을 치는 시늉까지 하고 멋쩍게 웃었다.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나는 말없이 콜라를 내쪽으로 당겼다.
“저.. 우리 아는 사이잖아요, 그죠?”
나는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그앨 쏘아보았다.“저..저 자리에서 그 쪽이 산책하는 걸 매일 봤거든요.” 모르는 여자에게 다짜고짜 아는척하는 이런 남자에게 경계심을 풀기란 쉽지 않다.
“매일 봤다고 아는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목소리에 날이 더 서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굳이 말을 섞고있는 나 자신에 스스로 놀랐다.
“아 맞아요..”그 앤 금새 풀이 죽었지만 어쨋거나,나도 이 애를 ‘눈여겨’ 봐왔다고 인정한 셈이었다.
“저.. 혹시 이 노래 아세요? 스페이스 오디티(Space oddity).데이빗 보위.”
갑자기 A가 이어팟 한쪽을 나에게 내밀었다.당황한 난 고개를 돌려버렸다.그러자 별 타격감은 없다는 듯 A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사실 그 쪽이 들어오기 직전,이 노랠 듣고 있었거든요.가사가 우주 비행사가 우주여행을 떠나면서 관제소랑 연락하는 내용이거든요.우주비행사가 톰이에요,톰 소령.아무튼 이 노래에 텐.나인.에잇 ..하고 비행사가 우주로 떠나기 직전 카운트다운하는 소리가 나오거든요,근데 그 순간에 그 쪽이 생각지도 못하게,막 어둠을 뚫고 이리로 뛰어오는거에요 .하하 ...”
노래? 톰 소령? 이 애는 어쩌면 매일 밤 맥도날드를 유영하는 엉뚱한 오타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내 기색을 살피며 잠시 민망한 표정이던 A가 곱슬머리를 쓸어넘기더니 무중력 상태처럼 떠버린 대화를 다시 이어갔다.
“근데,이 밤중에 왠일이세요?나도 곧 나가려던 참인데..여기가 24시간이긴해도.. 이 동네가 번화가도 아니라서 좀 ..”서글서글한 말투와 무해한 표정,부드럽게 늘어뜨린 곱슬머리와 눈밑에 살짝 퍼진 주근깨까지...왠지 이 아이가 전하는 모든 느낌이 희한하게도 나를 안도케 했다.그래서,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말해버렸다.
“탈출했어요”
나는 말을 꺼낸 순간 후회가되어 하릴없이 그의 얼굴에 난 주근깨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탈출요? 이 밤중에?어디로부터요?방탈출은 아닐거고.하하” 가만히 보니 말 끝에 웃음을 묻히는게 습관인 듯한 이 아이의 입술은 웃을 때 하트 모양으로 부드럽게 물결 치고 있었다.이어서 그가 갑자기 내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나는 왠지 귀 뒤로 열기가 퍼지는게 느껴져 식은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지금 눈 앞에서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A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날 걱정하는 이 애가 위험 인물인지 안심해도 될 인물인지 머릿 속이 혼란스러웠다.그저 입 안 가득히 퍼지는 매혹적인 단맛을 음미하며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던 나는 그만 남은 콜라를 연거푸 들이켰다.햄버거로 폭토를 한 이후,일주일간 꼼꼼히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갑자기 달큰한 콜라를 급하게 들이켜서인지,아님 설탕과 고칼로리에 대한 조건반사였는지 목구멍 가득히 우욱,하고 토기가 올라왔다.침을 꿀꺽,삼키며 버텨보려했지만 .. 이미 몸은 화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화장실 거울을 보는데,퀭해진 눈에 눈물자국이 선명했다.‘저녁을 먹는게 아니었어’자책하며 휴지로 벌개진 눈 주변과 눈가를 꾹꾹 눌러 닦았다.하지만 눈 안쪽에서 묵은 눈물이 자꾸 배어나왔다.시간이 너무 지나면 의심을 받을까봐 조마조마하며 그 애의 시선을 애써 피해 자리로 돌아왔다.
침.묵.
마치 벌을 서고 있는 기분이었다.맥도날드를 나지막히 유영하던 음악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고,주위는 달의 뒷면처럼 고요했다.불안해진 나는 A를 애써 피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눈가에 아직 따뜻한 느낌이 남아있었다.그 때 그가 하얀 냅킨을 내밀었다.나는 얼떨결에 냅킨으로 눈주변을 살짝 훔친 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가만히 날 응시하는 A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때였다.
“은수야..”
나는 환청이라도 들은 듯 화들짝 놀라 두리번 거렸다.
“은수...태.은.수..맞지?”
“나 기억 안나?”
내 이름을 부르는 A의 모습이 꿈결인 듯 초현실적이었다.
“나 진짜 몰라? 미성 초등학교.동창”
“초등학교 5학년 때 니 반으로 전학왔던,태윤이.안태윤.”
난 얼얼해진 해마를 마구 뒤적여보았다.하지만 기억 세포들이 제대로 연결되지 못해 혼란스럽던 그 때,그 애는 여전히 나를 탓할 생각은 없는 듯 말간 얼굴로 말했다.
“ 괜찮아.아마 기억 못할 거라 생각했어.난 6개월만에 다시 전학갔었구..그 때보다 키가 38cm가 컸으니까.하핫.”
‘전학생..전학생..아,그 ...전학생...?’내 대각선 뒷자리에 앉아있던,내가 뒤돌아볼때마다 종종 나와 눈이 마주쳤던 그 애.나는 막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천천히,말간얼굴에 안경을 낀,앞머리가 곱슬거렸던 작고 조용한 과거의 그 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래 기억나..미안..너무 달라져서..전혀 몰라봤어”
“그럼,넌 처음부터 날 알아봤어?”난 그 애가 늘 앉던 자릴 살짝 눈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단번에 널 알아본 건 아니었어.창밖은 어둡기도 했고 넌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으니까.근데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너가 날 쏘아보는 것 같은 찰나에,너인줄 알겠더라” 나는 그저 그 애의 다음말이 무척 궁금했다.
“사실 6년전 쯤,나 우연히 너 본 적 있어.그 당시 혜화동에서 혼자 걷고 있는데,맞은편 골목길에서 너가 나오더라.난 바로 널 알아봤어.그때 넌 초딩때 내가 알던 얼굴 그대로였거든.유난히 가로로 긴 눈도 그대로고.좀 야윈 것 빼고 말이야.내가 어떻게 했는 줄 알아?하핫”
나는 눈을 크게 떠 다음 말을 재촉했다.
“잽싸게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지.무슨 생각인지 널 따라가기로 했었거든.근데 얼마 못 가 신호등앞에서 그냥 멈췄어.”
“왜.”
“그냥..니가 날 알아보지 못할까봐.따라가봤자 말도 못걸까봐...결국 너 혼자 신호등을 건넜지.”이번에 그는 웃지 않았다.
난 무슨말을 해야할지 알지 못했다.6년 전 나를 우연히 봤던 태윤이가 이 곳 맥도날드에서 또다시 나를 알아봤고,매일 나를 기다렸으며,근 일주일동안은 집에만 처박혀있던 터라 언제 또 나타날지 모를 날 자정이 넘은 시각까지 기다리고 있었다고 멋대로 상상했다.
“어쩌면 ..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날씨때문일까.아님 듣고있던 노래때문일까.오늘은 왠지 너에게 말을 걸 용기가 생겼던 것 같아.하핫”
그렇게 웃음이 묻은 눈으로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태윤이의 까만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태윤이 너머 창밖엔 어느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시원하고 세차게,목마른 세상을 마침내 축복하는 듯한 비가.창밖의 빗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렸다.우린 그 빗소리를 함께 들었다.문득,태윤이가 물었다.
“너 햄버거 좋아해?”
난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을 뿐 대답하지 못했다.
“다음엔 진짜 맛있는 햄버거 같이 먹자.나랑.”
나는 곧 그 말을 곱씹어보았다.'햄버거 먹자,나랑,같이,다음엔... '난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그러자 마침내 태윤인 해맑게 웃었다.하트를 그리는 그의 미소가 티셔츠 속 리트리버랑 꼭 닮아있었다.
“아까 그 노래 들어볼 수 있어?”
갑자기 태윤이가 듣고있던 음악이 궁금했다.태윤이가 가만히 한쪽 이어팟을 내주었다.음악을 듣고 있자니 새까만 밤에 홀로 빛나는 맥도날드 우주선 안에서 우주 오타쿠 톰소령의 절친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지구와의 교신도 걱정되지 않았다.
그저 오래오래 이 촉촉하고 깜깜한 새벽이 계속 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