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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온미라클 Mar 30. 2023

절망의 산을 옮길 겨자씨 한 알

민들레 홀씨 되어 날다.


  따르릉따르릉

"네, OO 중국어 학원입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채령이 엄만데요. 아이들이 연수에서 돌아오는 날 학원차로 같이 마중을 가도 될까 해서요?"                                                                                                                                    

"...,..., 네, 시간 맞춰 학원으로 오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겨울방학을 이용해 중국 청도로 연수를 떠났던 아이들이 돌아오는 날이다. 한 달 만에 아이들과 만날 생각을 하니 맘이 부산하고 바쁘다. 인솔 교사도 있고, 가끔씩 통화도 했는데 괜한 걱정이 올라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이들이 오면서 뱃멀미는 하지 않았는지?',  

'밤에 잠은 잘 잤는지?', ‘왜 아이들 힘들게 비행기를 안 타고  오는지?’ 원망스럽기도 했다.  


  허둥지둥 준비를 마치고 택시를 탔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만날 생각에 들떠 있는데 현수막 하나가 빨려 들어왔다. 

‘전산세무회계사무원 양성과정 교육생 모집' 

슬로 모션으로 다가와 눈앞에서 춤을 추었다. 바닥을 친 자존감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깊은 어둠 속에 봉인돼 있던 세포가 깨어나고, 자의식이 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여상을 나와 경영학을 전공한 나다. 고등학교 땐 ‘부기 문제집’을 이틀에 한 권씩 풀어댔고 친구들에게 가르쳐도 줬다. 타이핑 실력도 남부럽지 않다.


  나를 위해 차려진 밥상 같고, 긴 가뭄 끝자락에 걸린 한 조각구름 같았다. 하지만,  금세 풀이 죽었다. 서른일곱 살에 3명의 자녀를 둔 12년 전업주부가 감히 넘볼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 비웃고 있는 것 같아 얼굴이 빨개지고, 더 깊은 좌절과 절망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심한 갈증을 해소해 줄 것 같았던 구름이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사실, 이날의 외출도 아무도 찾지 않는 나만의 섬을 탈출하고 싶은 간절한 몸부림에서 시작되었다. 한 시간만 더 기다리면 집 앞에서 아이들을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따라나선 건, 밀려오는 공허와 절망으로부터 잠시라도 탈출하고 싶어서였다. 혼자 와있는 나를 보고 아이들이 당황할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다. 그만큼 절실했다. 어디든 떠나고 싶은데 혼자 갈 수 없는 무기력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따라나선 것이다.   


  텅 빈 버스를 타고 항구까지 가는 내내 머릿속은 온갖 소용돌이로 정신없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충돌하며 격렬한 토론이 벌어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원할 텐데 나이 많은 나를 뽑아주기나 하겠어?'                                                

'그냥 말기엔 너무 아깝잖아. 한번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괜히, 나이 많은 아줌마가 주제도 모르고 나댄다고 하면 어쩌지?'                                            

'뭐, 어때.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인데...'

'운 좋게 배울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이 나이에 취업할 때는 있고?, 괜히 시간만 낭비하고 더 비참해지는 건 아닐까?'                                                                                                                    

'안될 땐 안되더라도 신청은 해봐. 다른 건 몰라도 이거라면 진짜 잘할 자신이 있잖아.’        

희망과 절망의 문턱을 수없이 넘나들다 보니 어느새 항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한 번 불어닥친 회오리바람은 그칠 줄 모르고 끝없이 휘몰아치기만 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혼자 온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동안 못다 한 수다를 전하느라 바쁜 아이들로 인해 잠시 나의 무인도가 시끌벅적해졌다. 하지만, 한껏 들뜬 아이들과 즐거운 대화 중에도 '전산세무회계사무원 양성과정 교육생 모집'이란 글자가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마치, 버뮤다 삼각지대를 배회하고 있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수시로 핀잔을 받았지만 옆길로 새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절호의 기회잖아. 네가 잘했던 회계를 컴퓨터로 다시 하는 것뿐이야.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해 봐. 뽑히기만 하면 넌 무조건 잘할 수 있을 거야.’하는 소리가 쉬지 않고 괴롭혔다.


  며칠의 고민 끝에 ‘안될 땐 안되더라도 시도나 해보자.’하는 결심이 섰다. 내가 잡을 수 있는 마지막 끈일지도 모르는데 당겨보지도 않고 놓아 버릴 순 없었다. 무인도 탈출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빛일 수도 있는데 그냥 포기해 버리기엔 나에게 너무 미안했다. 내 이름을 그렇게나 찾고 싶어 했으면서, 실패가 두렵다고 시도조차 두려워했던 게 창피해졌다. 움직이다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지라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바빠졌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길 수 있다(마태복음 17:20)’는 성경 구절을 믿고 작은 씨라도 심어 보기로 했다. 그동안 간절함으로 밭을 갈고 몸부림의 물을 열심히 준 대가로 날아온 운명의 씨앗을 위해 부지런히 곡괭이질을 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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