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자격증이 가져다준 파랑새
달그락달그락
아이들 아침 챙기랴, 도시락을 싸랴 분주한 아침이다.
아이들이 현장학습 가냐고?
"NO"
내 도시락이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수업을 받아야 하니 도시락을 싸가야 한다. 마치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외로움과 절망으로 몸부림칠 땐 마음이 그렇게 아프더니, 요즘은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6교시 수업을 받고 나면 죽을 맛이다. 안 쓰던 머리 굴리느라 쥐도 날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은 하늘을 나는 것 같다. 새장 안에 갇혀있던 새가 하늘을 훨훨 날고 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첫 시간, '회계란?' 이 한마디에 전율이 흘렀다. 봉인되었던 감각들이 깨어나 시끄럽고 부산스러웠다. 분개를 하고,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를 만드는 게 이렇게 황홀한 일인 줄 몰랐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날은 사라졌던 언어들이 춤을 추며 등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엑셀 함수와 파워포인트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파도타기를 했다. 하루하루가 징글맞게 재밌고, 어렵다. 고통이 행복이란 말이 딱 맞는 그런 날들이다.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반장으로 뽑혔다.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나이가 많고 경영학 전공자여서... 학창 시절 학급을 이끌던 생각이 났다. 기왕이면 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려워하는 회계를 조금씩 알려주기도 하고, 가벼운 간식 공세로 분위기 조성도 했다. 이런 노력이 통했는지, 교실이 조금씩 뜨거워지더니 어느 날부턴가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타올랐다. 선생님들이 빨리 타는 불이 빨리 꺼진다며 걱정들을 하셨다. 하지만, 우린 지푸라기가 아니라 장작불이라며 수업 후에도 함께 공부를 했다. 20대 젊은 친구들은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난 회계를 알려주었다. 그때 우리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으면 서울대 가고도 남았겠다."였다.
신기한 건 그렇게 재밌게 공부를 하면서도 5분 일찍 수업이 끝나면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영락없는 여고생들이었다. 점심 도시락을 함께 먹고 수다 삼매경에 빠지는 것도 즐겁기만 했다. 식사 후 10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오는 스릴은 담치기하던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4교시 선생님보다 먼저 골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결석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것도,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것도 똑같던 시간이었다.
즐거움에 푹 빠져 도낏자루가 썩는 줄 모르고 있던 어느 날, 막내아들 유치원이 휴원이라고 했다. '세상에나 맙소사!' 청천벽력이었다. 괜스레 유치원을 원망하고, 흘겨도 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석은 하기 싫은데, 아이를 맡길 곳이 없었다. 밤새 고민을 하다 데려가기로 했다. 다음날 색칠공부와 간식을 잔뜩 들고 나타난 아들을 보며 모두 당황스러워했다. 모두에게 미안했지만 철면피가 되었다.
아들은 수업 시간을 견디는 게 지루한지 얌전히 있다가도 한 번씩 칭얼댔다. 나도 50분 수업이 지겨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어린것이 오죽할까 싶어 백번 이해가 되고 또 이해가 됐다. 하지만, 현실은 아들을 달래느라 진땀이 흐르고 속이 탔다. 그 후에도 아들과의 조마조마한 줄타기를 몇 번인가 더했던 것 같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이젠 이름도 생소한 주산, 부기, 타자란 유물 자격증 대신 새로운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전산회계 1급, 전산세무회계 2급, ITQ(한글, 엑셀, 파워포인트) A등급이 내 것이 된 것이다. 자격증을 하나씩 딸 때마다 빈 둥지 같던 마음에 자신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름마저 고오급스런 자격증 덕분에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무인도' 대신 '희망'이란 섬이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았다.
잘 보이지도 않던 겨자씨 한 알이 어느새 뿌리를 내리고, 싹 틔울 준비를 부지런히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제 ‘나의 이름’, ‘나의 희망’이 새겨진 배에 출발 신호를 내리고 힘차게 노를 저어야겠다. 절로 흥얼거려지는 <희망의 나라로>란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면서...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 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산천경개 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 찬 곳 희망의 나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