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단절 고리 끊고 취업이란 골 넣기
금상 수상으로 들떠 있는 마음이 채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이번엔 취업을 하란다. 그동안 자격증도 따고, 자신감도 많이 회복했다지만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뜻밖의 소식에 가슴이 벅차오르면서도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했다. 학교에서도 아직은 취업보다 자격증을 취득하는 데 더 신경을 쓰던 때라 취업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왜 젊은 사람들을 제치고 내가 1호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알선해 준 곳은 'OO 간호직업전문학교 행정 직원'이었다. 6개월 동안 이런 곳에 취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며 부러움의 침을 삼켰던 곳이다. 하지만, 서른일곱 살의 12년 전업주부가 넘보기엔 하늘의 별만큼 어려워 보인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 알선을 해준단다.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동안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가는 배도 갈아탔다. '절대 취업을 못할 거야'란 부정의 마음이 사라지고, 언제부턴가 '꼭 취업할 수 있을 거야'란 막연한 기대감으로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은 안갯속을 걷는 듯한 모호함이고 바람일 뿐이었다. 그런데, 공부하던 곳과 비슷한 곳에 면접을 보라고 한다. 꼭 도깨비에 홀린 것만 같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엄마, 취업할지도 몰라. 내일 면접 보러 간다."라며 몇 번을 흥분해서 말했다. 그날 우린 축하파티를 했다. 취업을 하고 못하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날이었다. 그동안 꽁꽁 묶어 내동댕이 쳐놨던 나란 존재가 인정받은 것만으로도 뛸 듯이 기쁜 날이었다. 그러기에 맘껏 축하받고 즐기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니 그저 같이 좋은 건지, 진짜 좋은 건진 몰라도 모두가 신나고 행복한 날이었다.
짧은 축제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야 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다. 한 칸 한 칸 채워보지만 12년의 공백이 너무 크게 뚫려있었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역사가 너무 초라한 것 같아 왈칵 눈물이 났다. 아직 빈 줄이 많이 남아 있는데 더 이상 쓸 게 없다. 그나마 새로 딴 자격증들이 체면을 살려줬다.
머리를 쥐어짜며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는데 그동안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직업학교에 접수하던 날 취업을 안 한다고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래도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그날의 하얀 거짓말이 새로운 나를 탄생시켰다는 생각이 들자 피식 웃음이 났다. 아니, 절망의 늪을 벗어나고자 떠났던 여행에서 현수막을 보지 못했더라면 이런 씨앗조차 심어보지 못했겠지? 덜컥 저질러 놓고 아이들한테 소홀할까 봐 전전긍긍하기도 했었는데... 지난 6개월의 기억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파도타기를 하며 흘러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깨비가 한바탕 방망이를 휘두르고 간 것만 같다.
다음날, 아침부터 손바닥에 땀이 나고 심장이 고동쳐 댔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면접이기도 했지만 꼭 취업하고 싶다는 간절함에 잠을 설쳤다. 얼굴도 푸석푸석했다. 예쁘게 화장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원래 없던 솜씨에, 까칠해진 피부까지 더해 잘되지 않았다. 과유불급이라더니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과해 오히려 뒤죽박죽이 돼 버린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동안 키워 논 콩알만 한 자신감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12년 경력단절'이란 글자만 커다란 족쇄가 되어 다가왔다.
그렇게 쿵쾅쿵쾅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왠지, 와선 안될 곳에 온 어린아이처럼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고 영 민망했다. 갑자기 공기가 탁 막히면서 하얀 백지가 돼버렸는지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시원했던 사무실이 후덥지근하고 바들바들 떠는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인자하게 웃으며 이것저것 질문하는 원장님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뭘 대답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횡설수설한 것 같다. 다행히, 알선해 준 학교에서 좋게 얘기를 해줘 나쁘지 않은 분위기로 면접을 끝냈다. 아니, 대박 사건이 벌어졌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바로 출근할 수 있나요?"
너무 놀라 대답을 못하고 있으니 다시 한번 물어보신다.
"바로 출근하기 어렵나요?"
'뭐? 출근? 그럼 합격한 거야. 이거 꿈 아니지? 몰래카메라나 뭐 그런 거 아니고 진짜지?' 순간 오만가지 생각과 마구마구 비집고 올라오는 웃음을 겨우 눌러 참고 대답을 했다.
"네, 가능합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기로 합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이 하늘에 둥둥 떠있는 것 같았다. 작열하듯 내리쬐는 8월의 뜨거운 태양도 오늘만큼은 나를 축복해 주는 팡파르를 불고 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경력단절 여성이란 옷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게 되었다.
그 옷은 일하는 여성들이 입는 '워킹맘'이란 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