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겠습니다.

끝 그리고 시작

by 인프피아재
네가 여기로 오고 있다면
언제 도착할지는 관심 없어.

<당신의 꿈>





웬일로 하늘에 미세먼지가 하나도 없었어요. 푸른 하늘은 바다를 옮겨 놓은 것처럼 보기 좋았습니다. 평소 자주 가던 카페를 쉬엄쉬엄 걸어갔습니다. 햇볕은 조금 뜨거웠는데 견딜만했어요. 도착하니 좋아하는 구석에 앉을까 하다 밖에 앉기 좋은 날이라 조금 그늘진 곳을 찾아 앉았습니다.


항상 카페에서 책을 보거나 글을 썼는데요. 그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소 좋아하는 영화 OST를 들으며 지나다니던 사람들을 구경했습니다.


'작업복 입고 땀에 젖은 얼굴로 담배를 태우는 아저씨'

'헬멧과 선그란스를 쓰고 분주히 음식을 배달하는 라이더'

'양손에 큰 비닐봉지를 들고 어디론가 향하는 아주머니'

'바람결을 따라 흔들리는 풀과 나무들'


모두 각자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책임지고 감당하고 있었어요.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하루하루 멋지게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퇴사에
합격했습니다.


"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 어색한 미소로 부장님에게 면담을 요청했는데요. 이야기 나누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습니다. 전날 카페에 앉아 정리한 대본대로 진솔하고 담백하게 말했어요.


1. 그동안 많이 고민했다.

2. 나는 여기서 최선을 다해 일했고 미련이 없다.

3. 일이 어렵고 많아서 혹은 사람 때문에 힘든 건 아니다.

4.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고 싶다.

5. 지금이 퇴사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보다 완벽한 퇴사 사유는 없었습니다. 거짓말 좀 더 보태서 면접보다 더 열심히 준비한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들은 부장님은 아쉬워했으나 '이유를 들으니 더 붙잡을 수 없을 것 같다'라고 했어요. 그렇게 퇴사에 합격했습니다.






정리해야
할 것들


회사 규칙에 따라 퇴사는 한 달 전에 통보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퇴사하겠다고 말해도 다음날부터 쉬는 건 아니었어요. 아직 쓰지 못한 연차를 다 털어보니 2주 정도 일해야 했어요. 퇴사가 결정되면 출퇴근이 즐거울 것 같았는데 가기 싫은 건 여전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 보다 오랜 시간을 보낸 사무실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컸네요.


조금씩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이 자리에서는 3년 정도 일했는데, 생각보다 치울게 많았습니다. 도대체 자리에 두고 한 번도 보지 않은 서류와 자료는 왜 그렇게 많은지... 종이 아깝네요. 지금은 볼 이유 없는 옛날 매뉴얼 지침도 많이 있네요. 싹 다 처리했습니다.


컴퓨터 파일들도 정리했는데요. 퇴사해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자료는 따로 백업해 보존했습니다. 신입직원 시절, 사람 때문에 열받아 회사 때려치우고 중요한 파일 싹 다 지우고 나가겠다고 씩씩 거리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혹시, 누락된 업무로 퇴사 후에 전화 오면 현기증 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빠진 일은 없었는지 체크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일을 돌아보니 열심히도 살았네요.






작별
인사


다른 팀장들 그리고 사무실 직원들에게 퇴사 일정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유쾌하고 능력 있는 우리 팀 최고 선임이 제 팀장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요. 갑작스러운 제 퇴사 소식에 굉장히 당황했지만, 바로 어떻게 팀을 이끌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저보다 더 좋은 팀장이 될 것 같았어요. 안심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팀원들에게도 한 명씩 면담하며 퇴사 소식을 알렸습니다. 너무 놀란 직원, 서운해하는 직원, 눈물을 흘리는 직원 등등 각자 방식으로 아쉬움을 토로했어요. 무엇 하나 흠잡을 게 없는 우리 팀 막내는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저도 울컥했지만 같이 울면 그림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참았어요. 여러 가지로 많이 배웠고 함께 지낸 시간 못 잊을 것 같다고 하길래, 한 일주일 지나면 잊힐 테니 걱정 말라고 말해 줬습니다.


다들 아쉬워하고 축복해 줘서 고마웠어요. 그래도 직장생활 엉망으로 하진 않았나 봅니다. 다행이에요.






마지막
출근길


마지막 출근을 앞두고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요. 의외로 세상 편히 잠들어 신기했습니다. 알람 소리에도 벌떡 일어났는데, 내일부턴 파워풀하게 늦잠자도 된다고 생각하니 설레었아요. 퇴사 기념으로 팀원들이 사준 예쁜 티셔츠를 입었습니다. 그 순간,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란 게 실감 났어요.


너무 피곤하고 출근하기 싫어서 꾀병으로 연차 낼까 고민하던 모습도,

늦잠 자서 정신없이 15분 만에 준비하고 현관문을 뛰쳐나가던 모습도,

출근길이 너무 막히는데 갑자기 장트러블 와서 죽을 뻔하던 모습도,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커피를 수혈하던 모습도,

주변에 맛집이 없다고 불평하지만 그래도 뭘 먹을지 고민하던 모습도,

일과 사람으로 열받고 짜증 나고 서운하고 답답해하며 스트레스받던 모습도,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해결되지 않은 일에 심란해하던 모습도,

일 때문에 불면증 와서 끊었던 담배라도 태워볼까 하던 모습도,


이 지긋지긋한 모든 게 오늘로써 끝나는 날이었어요. 평생에 가장 기분 좋은 날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출근날 깨달았어요. 맡은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낸 모든 모습은 멋지고 아름다웠습니다.






마지막 퇴근을 끝으로 집에 무사히 잘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퇴사에 성공했네요. 내일부터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된다니 신기했습니다. 그냥 오랫동안 휴가 가는 기분이었어요.


명함은 퇴사 기념으로 하나 챙겨 왔는데요.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은 이 작은 종이를 보더라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지만, 옛날엔 이 작은 종이에 내 이름 석자가 쓰이는 게 꿈이었네요.


꿈을 이루고 싶어 퇴사했지만, 저는 이미 하나의 꿈을 이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토록 원하던 벼랑 끝에 섰습니다. 무엇이 보일지 궁금했는데 끝을 알 수 없는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네요. 이 두근거림이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여기서 뛰어내린다고 죽진 않을 것 같네요. 새로운 꿈을 위해 이젠, 뛰어들 시간입니다.



지금 서 있는 그곳에선
무엇이 보이나요?
keyword
이전 09화매번 퇴사에 실패하던 3가지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