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성 해외도피 증후군의 재발
세진모터스에서 철저히 수동적인 삶을 살기 시작한 후, 나는 여전히 도피하고 싶었다.
결혼 후 완치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던 나의 해외도피증후군이 다시 발병하기 시작했다.
답답했다. 세진모터스의 대표이사라는 자리가 족쇄처럼 느껴졌다.
세진모터스를 통해 얻는 경제적인 이익조차 나의 잘못으로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중압감이 견딜 수 없이 나의 숨통을 조여왔다. 고객과, 보험사와, 공무원과, 대기업과의 줄다리기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꿈을 좇을 만큼 철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내가 아닌 나로 숨 가쁘게 살아가는 이 삶을 과연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세진모터스를 탈출하기 위해 다양한 것들을 시도했다.
다시 공기업 재취업을 위한 도전, 각종 자격증 취득, 그리고 해외도피……
모든 시도는 손에 잡힐 것 같이 가까웠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무엇하나 부모님에게 확실하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현실도피가 취미생활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 즈음, 조금 더 확실하고, 완벽하고, 거창한 현실도피 계획이 필요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스웨덴 유학박람회였다. 스웨덴에서 유학생을 받기 위해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하고 있었는데, 나의 확실하고, 완벽하고, 거창한 현실도피계획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유학설명회에 온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도 있어 보였고, 전공도, 배경도, 나이도 제각각이었다.
스웨덴이 나를 잡아 끈 이유는 첫째가 아이들 교육 문제였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숨 막히는 인생을 이미 이 나라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경험하고 살아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들을 그 입시지옥으로 몰아넣고 싶지 않았다. 둘째는 이 치열하고 숨 막히는 삶에서 ‘탈출’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와 남편은 다른 어느 맞벌이 부부처럼 숨 막히게 살고 있었다. 아이들 아빠는 육아휴직 이후 복직한 직후였는데, 의도적인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가장 어렵고 힘든 부서로 발령받아, 매주 주말에 출근하고 새벽에 나갔다 오기도 했다. 나는 대표이사라는 직함 덕에 시간적인 자유로움이 직장인보다야 나았지만, 연일 핵심 직원들이 그만둔 인사 비상상황이라, 매일 야근을 해야만 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방치되기 일수였고, 문득 이 노력의 80%만이라고 스웨덴에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환상을 갖게 되었다.
그런 환상이라도, 꿈이라도, 목표라도 없으면 내 인생이 너무 팍팍할 것 같았다.
첫 장에 언급했듯이 나의 해외도피증후군은 습관성이었다.
하지만 꽤 구체적이고, 실존적이었다.
나는 세진모터스에 있는 동안 몰래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 눈에 띄지 않게, 직원들 몰래 골방에 들어가 스웨덴에 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과거의 영어실력을 쥐어 짜냈다.
어차피 내가 신경을 써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돌아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 세진모터스였다. 그렇게 영어공부를 하는 것은 세진모터스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나의 몸부림이었다.
스웨덴행을 준비하는 동안만 이라도 나는 새로 시작할 인생을 꿈꾸며 행복을 맛보았다.
학교에 들어가면 내가 장기비자를 받을 수 있고, 아이들은 스웨덴 무상교육으로 학교에 갈 수 있을 것이며, 아이들 아빠는 마지막 남은 육아휴직 카드를 한번 더 쓰는 것이다.
어차피 급여 한 푼 한 푼 모아봤자 평생 집 한 채 사기 힘든데, 그동안 모은 돈으로 집보다 더한 가치, 우리 가족의 행복이라는 가치에 투자하고 싶었다.
자신도 있었다. 중학교 때 영국으로 간 경험, 대학 때 일본으로 간 경험, 스웨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한국에서 사는 만큼 치열하게 살면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긴 여행을 떠나는 거라고… 스웨덴의 사진들을 보면서 마냥 희망에 차올랐다. 그렇게 달콤한 꿈을 꾸며 매일매일의 팍팍한 삶을 버텨나갔다.
스웨덴에 원서를 낸 학교에서 합격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심상치 않은 뉴스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바이러스로 우한이 봉쇄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한 두 명씩 확진자가 나오기 시작하고, 대구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국내에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한 두명만 감염이 되어도 벌벌 떨 때였다. 상황은 전 세계적으로 심각해졌고, 합격일이 다가오자 스웨덴의 집단면역 실험이라는 기사가 콕 집어 방송되기 시작했다.
점점 더 나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단순히 가고 못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막연한 불안감과 허무감,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무력감……
나는 왜 그렇게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했는가.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비현실적인 현실에 마주한 후 나의 도피계획조차 현실에서 버티는 삶 못지않은 아등바등함이 아니었나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각 나라들이 셧다운 되고,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않게 되었다. 죽을 만큼 숨 막히던 일상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코로나로 빼앗긴 일상 속에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가, 나는 왜 그렇게 일상을 도피하려고 애썼나?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어차피 저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에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인생인데, 정말 그곳에 가는 노력이 나를,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아이들을 행복한 교육환경에서 교육시키고 싶다고 그렇게 외쳤지만, 정말로 그곳에서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이 더 행복한 일일까? 매일 왜 그렇게 한국에서 돈 때문에, 집 때문에, 아이들 교육 때문에 치열하게 살아야 하나, 다 버리고 떠나고 싶어라고 하지만, 그곳에 간다는 것도 다른 의미의 치열함 아닌가? 결국 모양만 다르지 본질은 같은 느낌이었다.
학교에서 합격 메일을 받았다. 이때부터 나의 마음은 소용돌이쳤다. 그렇게 도망가고 싶어 절박했던 마음, 그리고 그게 뭐 어때서라는 허무한 마음……
그래도 합격이라는 그 비현실적인 현실은 너무 달콤하고 즐거웠다.
다른 합격한 사람들과 정보도 나누고, 그곳에서 살 집도 알아보고, 비자 신청도 알아보고, 아이들 학교도 알아보고……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그런 과정들이었다.
그러나,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켜내야 할 아이들이 같이 가는 스웨덴행이었다. ‘오영주’ 혼자의 삶이라면 판데믹의 소용돌이도 굴하지 않고 미지의 세계로 용감하게 뛰어드는 철부지이지만, 이미 나에게는 현실에 발을 딛고 지켜내야 하는 어린 두 생명이 있는 엄마라는 역할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스웨덴 학교 측에 팬데믹으로 인한 대책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저 팬데믹이 더 심해지면 온라인 수업을 병행할 수도 있다는 답변뿐. 입학유예 등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스웨덴은 진짜로 집단면역을 신봉하고 있는 듯했다.
이런 혼돈의 상황 속에서 가장 큰 숙제는 부모님에 대한 설득이었다. 늘 나를 현실감각 없고, 세상 물정 모른다고 하시는 부모님께 설득이 될 만한 계획이 전혀 아니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불을 보듯 뻔하게 알고 있었다. 당연히 반대할 것이고, 당연히 나의 의지는 꺾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카드를 결정적일 때 내밀고 싶었다. 아픔에 대한 신음소리처럼, 내가 이렇게 현실에 대해 아파하고 있다고 어필하고 싶었다.
때마침 그때는 사업 운영에 대한 형편없는 성적표에 아버지를 크게 실망시키고 있을 시기였다. 그 어느 날도 내가 거래처에 대해 당차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딸이 아닌 사원으로서 혼나고 있었다. 나 역시 꾹꾹 참아오던 나의 비밀의 카드, 스웨덴행 카드를 내밀었다.
“아빠, 나도 이제 더 이상은 못 하겠어요. 사업은 도저히 저랑은 안 맞는 것 같아요. 저도 알아요 철없는 생각이라는 것을요. 저 나름대로 아이들 교육과, 저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요.”
“그래서, 뭐 대표이사를 그만 두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럼 도대체 넌 할 수 있는 게 뭔데? 뭐 해 먹고살 건데?”
“제가 꼭 이일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저도 나름 아이 키우기 전까지는 직장도 있었고, 제가 일하던 분야에서 그렇게 아무것도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에요. 물론 경력 단절 때문에 이 나이에 쉽게 취직하기 힘든 것도 알아요. 하지만 세진모터스 아니면 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안 그래도 여기서 충분히 제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고요.”
“무슨 자존감이 어떻고. 참 현실감각도 없다. 그럼 넌 도대체 뭘 해 먹고 살 거야! 계획이 있는 거야?”
“저 스웨덴에 갈 거예요. 대학원으로. 스웨덴 대학원은 장학금 받기도 수월하고, 아이들 교육은 무상이에요. 모아 놓은 돈으로 그곳에서 2년간 살고 올 계획이에요.”
“……”
미국, 영국, 일본 뭐 이런 나라도 아니고 뜬금없는 더 북쪽 미지의 세계 스웨덴이라니……
아버지는 할 말을 잃으셨다.
“그럼… 그 2년 뒤엔 뭘 한다는 거냐? 이 나이에 유학을 다녀온들,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그건 그때 생각해 볼 거예요. 그곳에 정착할 수 있는 길도 있을 수 있고, 돌아와서도 먹고사는 거 못하겠어요?”
부모님은 또 한 번 나에게 크게 실망하셨다. 대책도 없고, 대책이라고 내놓은 계획은 하나같이 엉성하고, 저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뭘 하겠다는 건지. 왜 저 아이는 40이라는 나이를 바라보면서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가.
나는 더 깊은 현실에 대한 고민이었는데, 부모님의 눈에는 아직도 철없는 어린애였다.
그리고 이 대화로 나 역시 깨달았다. 더 이상 철부지가 되기에는 나 역시 현실에 단단히 뿌리 박혀 버렸다는 사실을… 겉으로는 할 수 있다고 선언했지만, 그건 부모님에게 도망가고 싶다는 응석 부리기, 떼쓰기였다. 나는 부모님의 그런 반응을 한쪽으로는 동의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갔을 때 현실적으로 부딪힐 문제들에 대해 나 역시 스스로 준비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 아이들과 내가 코로나에 걸려 아프기라도 하면 그 땅에서 의지할 곳 없이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답은 노였다. 합격자들과의 단톡방에서 정보를 공유하면서, 나도 혼자 가는 것이라면 아무런 걱정 없을 텐데, 아이들과 가족들, 이제 지켜야 할 것이 많은 나에게는, 의지만으로는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 일들도 많구나. 이제 삶의 무게를 벗으면 안 되는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스웨덴행을 접었다. 스웨덴행을 고민하며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평범한 일상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지금 여기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지금 내가 내 삶 속에서 감사한 것들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다면. 부부가 함께 하루에 한 번이라도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이곳에서도 지킬 수 있는 나의 행복이 아닌가. 그렇게 나는 오늘의 행복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했다.
물론 언제 또 도피 프로젝트 취미생활을 다시 시작할지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