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타이밍은 바로 이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회장님은 나의 사직서를 그자리에서 갈기 갈기 찢어 버렸다. 90년대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광경이 눈 앞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사표를 반려하겠다는 뜻인데...기뻐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험난한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것인가?
"엉뚱한 소리하지 말고 하던 일 계속 열심히 하고 있어"
'...'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머리가 복잡해 지기 시작한다.)
회사는 도쿄 도심의 한 대형 상업시설에 입주해 있었다. 두 개의 오피스와 지하에 자사 창고를 두고 있었으며 온라인에서 판매 되는 상품은 직접 전표를 뽑아 발송하고 있었다.
당시 온라인 쇼핑몰팀의 가장 큰 미션은 악성재고 처리였다. 홈쇼핑을 위해 사입했던 제품들이 예상보다 판매가 부진해 어쩔 수 없이 전량 회수하여 지하 창고와 오피스 일부 공간에 보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부 상품을 제외하고는 도매 유통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최종 루트는 온라인 밖에 없었다.
때마침 온라인 운영 컨설팅을 받고 있었고 온라인 마케팅에 대한 기본기와 실전에 대한 경험치가 조금씩 축적되고 있었다. 이때 나는, 창고에서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전동 물걸레 청소기를 아마존 재팬 FBA(창고)에 입고시켜 판매하는 것을 팀에 제안하였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FBA 입고를 위한 제품 등록과 라벨 부착, 검품 등 많은 수작업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매출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힘든지 모르고 작업에 임했다. 그렇게 창고에 제품을 보내고 디자이너들과 의견 공유를 하며며 컨텐츠를 개선해 나가고, 컨설팅을 통해 습득한 운영 지식을 활용해 보기도 의견을 구하기도 하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 들을 해나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상품이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1개당 2만엔 (약 22만원)가량 하던 제품이었고 1만엔 이하 저가 제품들이 많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판매 속도는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알고리즘의 영향이 있었지 싶지만) 반년도 안 되어 재고는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팀 매출도 매월 상승세를 기록했다.
2년전까지만 해도 어떻게해야 온라인을 통해 매출을 만들 수 있을지 방법도 경험도 없었고, 매일 같이 클라이언트들에게 죄를 짓는 마음으로 살았던 나는, 이제서야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이는 것 같아 비로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020년 봄. 본격적으로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팬더믹 선언 이후 상업시설들은 영업 중지나 제한적 영업을 했고 식료품 사재기로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처했다. 마스크는 커녕 휴지까지 구할 수 없는 사상 초유의 사태.
코로나로 인하여 소독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면서 증가하면서 알코올 관련 제품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화장품 제조/수입도 병행하고 있던 회사는 일본 대형 유통사들로부터 소독 관련 제품을 만들어서 공급해 줄 것을 요청 받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회사는 한국에서 알코올이 함유 된 핸드젤을 제조하여 일본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일본내 3번째 이내의 출시 였을 것이다. (그정도로 속도가 빨랐다.) 이렇게 단시간에 상품을 들여올 수 있었던 데에는 회장님의 능력이 컸다.
그는 정재계 인맥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신속하게 제품 공급이 가능한 업체를 찾을 수 있었고 공장 라인 전체를 우리 제품 공급을 위해 돌릴 수 있을 정도의 캐퍼도 확보 했다. 아마 일반인들이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세상 불공평 하긴 하지만 인맥도 능력이다...)
일본에 들여온 제품 중 일부는 온라인 쇼핑몰에 팔기로 했고 신속하게 상품을 등록했다. 그리고 제품 입고와 동시에 판매를 개시했는데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늦은 오후부터 페이지를 오픈 했는데 다음날 아침 매진이 되어 있었다. 밤 사이에 수천건의 주문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다음 입고전까지 예약판매를 진행했는데 이마저도 순식간에 주문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실패 했던, 그리고 이 회사에서도 그다지 실적이 나오지 않던 야후재팬 쇼핑에서도 이변이 일어났다. 월 매출액이 1,000만엔을 넘어서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 경험들 뒤에는 많은 문제점들도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연이은 직원들의 퇴사, 급작스러운 매출 증대와 사회적 이슈(한국산 핸드젤의 알코올 함량 허위 표기) 발생으로 인한 고객들의 문의 증가. 그러나 이에 대한 대응책이 적절히 갖추어지지 않은채 고속선은 계속 전속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아침 9시 시작과 동시에 회사의 전화벨은 일사분란하게 울렸다. 이 전화는 오후 늦게까지 이어졌고 이러한 생활이 두 달 이상 이어졌다. 중간에 파트 타임으로 한국인 멤버가 일부 추가 되기는 했지만 이미 큰 폭풍우가 지나가고 난 후였고 한국산 제품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일본인 고객들은 한국인 담당자들의 어떠한 대응에도 만족스러워 하지 않았다. (한국인을 미워해서가 아니다. 여론적 상황이 그러했다.)
그리고 인기 상품의 절판 이후 이를 대채할 후속 상품이 부재했다는 사실이다. 회사에서는 기본적으로 홈쇼핑에서 취급할 상품을 중심으로 사입을 해오다 보니 소수의 단일 품목이 대다수였고 방송이 잡히지 않는 상품에 대해서는 추가 발주를 꺼리는 상황이었다.
매출에 대한 압박은 날로 늘어나는데 팔 수 있는 상품은 줄어들고, 그나마 신규로 개발하겠다고 임원진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상품은 컨셉이 매번 바뀌면서 발매 시기가 불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 또한 온라인 관련 업무보다는 홈쇼핑 서포트나 수출입 관련 업무가 배정 되면서 어중간한 위치에 놓이게 되어 버렸다.
매일 출퇴근을 하며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되뇌이고 또 도뇌여 봤다. 수차례 회사 상사에게 고민이나 개선(대응)방안에 대해 상담도 하고 보고도 해보았지만 지금은 참으라는 말 뿐이었고 어느것 하나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 했던 이직(離職)카드를 꺼내 들었고 어느 한 일본기업에 최종 내정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뒤 사직서를 제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