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해원 Mar 30. 2023

'이니광훈'을 제치는 그날까지

시골 여자 축구_2

© 이음



운동장에 공이 놓여 있으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나에게 이 공을 뺏어보라며 발재간을 부리셨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달려들었지만 그 공을 한 번도 빼앗아 본 적이 없다. 몇 번 더 달려들다 약이 올라 다른 데로 가버렸다. 그랬음에도 아버지가 축구를 잘한다고 생각 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어른과 아이의 체급 차이에서 나오는 차이라고 생각했을 뿐. 아버지가 실제로 운동경기를 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아버지 삶에서 운동이란 몸을 쓰며 즐기는 운동보다 부도덕한 사회와 싸우는 운동이 더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축구 실력을 알게 된 건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다. 나는 고등학교를 전교생이 6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시골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그 학교에 농사 선생님이었다. 우리 반은 유독 남자애들의 비율이 높았는데 그 친구들은 대부분 축구에 미쳐 있었다. 수업 시간 외 모든 시간에 축구를 했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 했는지 어느 날 학교에서 풋살 리그를 만들었다. 3, 4팀 정도가 만들어졌고 선생님들도 함께했다. 그 경기들을 보며 아버지의 축구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친구들은 아버지를 그 당시 유명했던 축구 선수 '이니에스타'의 이름을 따와 '이니광훈'이라고 불렀다. 리그의 열기는 계속해서 달아올라 팀마다 유니폼을 주문하고 해설진도 생겨났다. 경기도 많아졌다. 나는 그 열기와 분위기가 좋아 자진 매니저 신청을 했다. 우리 팀 경기가 있을 때 주변에 앉아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고 선수들에게 물을 떠줬다. 물까지 떠 준 건 자진 수발러가 된 것 같아 이제와 좀 수치스럽기도 한데, 어쨌든 매일 빠짐없이 나가 최우수 매니저 상도 받았다. 


그때 왜 직접 경기를 뛸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이후 여자 축구 리그도 생겨났지만, 그때는 고3이기도 했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뛰는 건 내 영역이 아니야’라고 선을 그었다. 그때 내가 나에 대한 더 넓은 안목을 가졌더라면, 내가 그어둔 선을 넘을 용기가 있었더라면 이제 와 느끼는 억울함을 덜 수 있었을 텐데. 그때는 몰랐다. 내가 이렇게 축구와 사랑에 빠지게 될 줄은.


무사히 고3 시절을 지나 대학에 가서는 나도 아버지처럼 몸으로 즐기는 운동보다 사회와 싸우는 운동에 더 관심이 많았다. 스포츠도 전략을 잘 세워야 경기를 잘 치를 수 있듯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어떻게 잘 싸울 수 있을지 배우기 위해 대학에 갔다. 그러나 어딘가 잘못된 전략을 짰는지 운동이 아닌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말았다. 결혼 후엔 집안일과 육아로 나름 잔근육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만져 본 내 팔다리에는 흐물대는 물살뿐이었다.


밖으로 나가 동네 사람들과 축구를 하게 된 건 재작년 여름이다. 방구석 축덕으로 산 지 1년이 좀 지났을 무렵이었다. 처음으로 직접 뛰어 본 축구는 TV로 보는 축구와는 차원이 달랐다. 첫 훈련을 받자마자 그동안 못 한다고 욕했던 모든 축구선수들에게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티비에 나오는 축구 선수들은 잘하건 못 하건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존경심이 생겨났다. 첫 훈련 후 미니 경기를 하는데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폐가 터질 것같이 아팠다. 그런데도 집에 돌아오는 길은 개운했다. 하면 할수록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처음에는 혼자 배우고 혼자 하는 것이 더 재밌었는데 지금은 나만 잘하는 것보다 함께 잘하는 게 더 재밌다. '축구는 팀 스포츠'라고 강조하던 사람들의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자기가 뛰는 자리를 잘 지키고 주변 친구들과 텔레파시를 주고받으며 패스를 잘 찔러 주었을 때의 짜릿함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매주 축구를 하러 운동장으로 나간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시간에 비해 실력은 너무 미미하게 늘었으나 그래도 성실히 나갔다는 것에 뿌듯함이 있다. 근면함으로 어쩌다 보니 주장 완장도 얻었다. 괜히 부끄러워 스스로 바지 주장이라 칭하지만 꽤나 자랑스럽다. 다른 동네 사는 친구들에게 은근슬쩍 자랑하기도 좋다. "나 우리 동네 축구부 주장이야"라고 말하는 내 자신이 좀 멋지다. 여전히 시합을 하고 난 뒤나 훈련을 하면서 스스로 부족한 모습(실력적으로나 인성적으로)을 마주 할 때면 '이런 내가 계속 주장을 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지만 그만큼 우리 팀에 대한 애정도 날로 늘어간다.


이제 할머니가 되어서도 축구하는 게 꿈이다.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도 아직 발재간이 훌륭한걸 보면 충분히 가능 할 것 같다. 이제는 아버지의 발재간에 속지 않고 한 번쯤 공을 뺏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 해 본다. 언젠가 이니광훈을 제치는 그날을 위해 이번 주 훈련도 열심히 해야겠다.

이전 01화 반축 반X의 삶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