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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해원 Apr 15. 2023

반축 반X의 삶

시골 여자 축구_1

© 해원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나에게 ‘같이 공 한번 차자!’라고 말했던 사람이 없다. 나조차도 밖으로 나가 공은커녕 달리기조차 해 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만큼 내가 하는 운동에 대해서는 거리가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축구 경기를 볼 정도로 축구를 좋아하면서도 ‘축구는 보는 거지 뛰는 건 아니야’라며 선을 그었다. 아이를 낳고부터 내 이름 앞에 붙는 ‘애 엄마’라는 수식어는 실로 고귀하면서도 너무나 무거워서 물리적으로나 인식적으로 수많은 경계를 만든다. 그 경계는 잔가지를 쳐주고 나아갈 길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대신 영역 밖에 일에 쉽게 겁을 먹게 한다.


그런 나를 TV 밖으로 이끌어 준 건 매일 같이 뛰자고 말하던 우리 집 어린이들도 아니고, 매 경기 골을 넣고 있던 손흥민 선수도 아니고, 골때녀 같은 TV 프로그램이 생겼다는 소식도 아닌 내가 알고 있던 동네 언니들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언니들이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긴 여자 축구팀에 나가 뛰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언니들은 나보다 나이도 많고 심지어 애도 많은 언니들이었다. 속으로 그어놓은 경계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요동쳤다. 내가 뛰진 않더라도 그 언니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축구를 하러 운동장에 나갔다.


내가 지금 뛰고 있는 팀 ‘반반 FC’는 면 단위 작은 마을에 생겨난 여자축구팀이다. 2021년 여름부터 시작했으니, 올해로 2년이 좀 넘었다. 우리 팀의 가장 큰 특징은 팀 훈련도 팀원들의 생활 반경도 모두 30분 안팎에서 해결된다는 거다. 주 경쟁 상대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활반경 안에 있는 동네 사람들이다. 같은 동네 고등학교 여자축구부와 초등학교 축구부, 그리고 족구팀 아저씨들이 그들이다. 이들과의 매치가 우리 팀의 가장 큰 행사이자 재미다. 이렇게 동네 사람들과 하는 축구는 경기 후 공공장소에서 마주쳤을 때 주고받는 인사가 특징적인데. 뜨거운 경기를 했을 때와 차갑게 식어 있는 일상 사이의 커다란 갭 속에서 주고받는 인사란. 심지어 나는 내 아들의 친구와도 치고받으며 경기하고 있는 실정이니 그들과 마주쳤을 때 그 복잡한 미묘한 심경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 팀 이름 ‘반반 FC’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사실 공식적인 의미를 두고 있진 않다. 한창 팀 이름을 정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몇 주 동안 뚜렷한 이름이 정해지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차에 J가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를 훈련에 데려왔다. 그리고 그 강아지 이름이 ‘반반’이었다. 강아지 이름을 듣더니 코치님이 갑자기 “우리 팀 이름도 ‘반반’으로 하는 거 어때요?”라는 제안을 했다. 다들 별 의견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갑자기 팀 이름이 정해졌다. 만약 그때 온 강아지 이름이 ‘바둑이’라던가 ‘방울이’였다면 바둑이 FC 나 방울이 FC가 됐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름을 정한 과정도 너무 우리다워서 웃음이 난다. 그래도 코치님은 남의 집 강아지 이름을 가져온 것이 마음에 좀 걸렸는지 그날 밤 이런 문자를 남겼다.


팀 이름 '반반' 의미를 더 찾아보면 좋을 듯합니다. 가령 팀에 마스코트가 있는데 갑자기 반반을 팀의 마스코트로 하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드네요. 반반과 함께하는 반반 축구팀 사랑을 주고받고 보살피고 이런 과정을 운동과 함께하자는 의미... 너무 복잡한가요ㅎ 갑자기 스치듯 생각이 들어서 꺼내 보았습니다^^


읽고 나니 왜 반반이 되었는지는 더욱 모르겠다. 하지만 코치님 특유의 화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또 웃음이 났다. 우리 코치님에게는 두 가지 화법이 있다. 하나는 ‘무슨 말인지 대략은 알겠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는’ 화법이고, 또 하나는 ‘장황하게 이야기하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화법이다. 어찌 됐든 말이 끝나도 그의 말뜻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특징인데, 요즘 팀원들 사이에서는 이런 대화법을 코치님의 이름을 따와 ‘MW(코치님 이름) 화법’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말이 끝나도 재차 물어서 확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 얼추 익숙해진 팀원들이 대신 요약 정리를 해주거나 대충 알아듣고 알아서 움직인다.


별다른 의미 없이 만들어진 이름이지만 나는 속으로 혼자만의 의미를 만들어 두었다. ‘일상 반 축구 반’ 일상만 유지하다 축구를 잊어버리거나 축구에만 빠져 일상을 해치지 않고 반반씩 균형을 잘 이루는 것. 그것이 내가 축구인이자 생활인으로서 축구와 나를 오래오래 사랑하며 지낼 수 있는 힘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반농 반X라는 말이 있듯이 나에게는 이제 반축 반X의 삶이 시작된 샘이다.


그러나 내가 그 균형을 잘 이루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올해는 축구와 글쓰기만 하겠어!’라고 다짐하고는 일주일에 세 번 축구를 가고 한 달에 한 번 축구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다. 나의 당찬 포부와는 달리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는 이 상황이 좀 우습다. 준비하던 대회가 끝나 이제 다시 일주일에 한 번 축구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축구하는 날은 나에게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다. 


무엇보다 같이 훈련하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분해하던 그 순간들이 쌓여 우정이 싹트고 추억이 만들어졌다. ‘이제 공동체는 질렸어’ ‘더 이상 관계 속에서 나를 들어내기 싫어’ ‘혼자가 최고야’ 하며 숨으려고만 했던 내가 ‘우리는 함께여야 해’ ‘우리 팀이 최고야’를 외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정확하고 섬세한 관계는 아니지만 둥글고 뭉툭한 관계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 우정에 기대어 부끄러운 플레이를 하고 부끄러운 인성을 들켜 머리를 쥐어뜯어도 발걸음은 다시 운동장을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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