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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 Sep 27. 2024

신림동 방한칸

신림동

나의 첫 서울방은 신림동이었다.

미로 같은 골목을 고불고불 걸어 엄마랑 같이 찾아간 곳은, 사촌언니가 학원에 다니기 위해 잠시 살다가 기간이 남은 걸 나에게 넘겨준 방이었다. 주인집인 노부부는 자식들이 쓰던 방이 필요 없어지자, 안채 집으로 통하는 방문을 잠그고 밖으로 문을 만들어 월세를 목적으로 만든 작은 한 칸 방이었다.   

   

내 키만 한 현관문은 반투명 유리로 햇볕이 들어와 어둡지는 않았다. 현관문을 열면 아래쪽에 수도꼭지가 붙어 있었고 수도가 연결되지 않은 한 칸짜리 싱크대가 있었다. 싱크대 위에는 가스버너를 놓고 홈이 패인곳엔 건조대를 놓고 냄비와 그릇을 놓았다.

문을 열면 나오는 공간은 세면대이며 설거지도 하는 물을 쓰는 주방공간이자 현관입구였다. 바닥에는 두 개의 대야를 놓고 하나는 물을 받아놓고 바가지로 물을 퍼서 머리를 감기도 하고 세수도 했다. 하나는 설거지할 것을 물에 담가두는 용도였다. 화장실은 밖으로 나가 주인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별도로 설치된 화장실을 이용했다. 쭈그리고 앉아서 볼일을 보는 수세식변기여서 긴 줄을 잡아당기면 저장된 통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방식의 화장실이었다. 가끔 대문이 잠겨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는 일도 있어, 물 쓰는 공간에서 소변을 해결하고 물을 흘러 보내야 하는 날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신림동은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한 번은 거쳐간다는 자취순례 동네였다.

무조건 서울만 가면 된다는 서울드림을 꿈꾸며 짐 싸들고 올라온 서울방은 그렇게 방한칸으로 시작되었다.   


엄마는 그 후로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빽빽한 집들과 미로골목을 걷고 사람들에게 묻고 헤매며 찾아낸 골목 끄트머리 집에 나를 데려다주고는 다시 북적이는 지하철을 타고 고속버스터미널로 가면서 말했다.


“나는 여기 살라고 해도 못살겠다.”      


신림동은 나와 같은 코딱지만 한 방이 많았다. 단독주택을 야무지게 개조해서 어떻게든 방한칸이라도 만들어 월세로 내놓은 집들이 앞집에도 옆집에도 지하철 입구가 다가오는 순간의 다세대 주택들 구석구석에도 방한칸들은 마련되어 있었다. 저렴한 방세로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작은방들, 지나가면 반지하방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창문엔 방범창이 촘촘히 줄지어 있었고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다 보였다.    

  

아침이면 나와 같은 서울살이를 시작한 학원생. 사회초년생, 대학생, 직장인들이 집집마다 쏟아져 나왔다.

자신만의 최단거리를 설정해 놓은 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골목 사이사이를 돌고 돌며 지하철 입구를 향해 가고 있었다. 여유 있게 나와 천천히 가다가도 빠르게 걷고 뛰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덩달아 마음이 급해진다. 누가 더 지하철입구에 먼저 도착하나 시합하듯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이 점점 빨라지며 도시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아직 덜 말린 젖은 머리카락은 걸어가는 사이에 땀이 되고 출근시간인 지옥철에 몸을 구겨 넣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쑥 빠져나가는 갈아타는 역을 손꼽아 기다리며 가방은 앞으로 안고 몸을 최대한 공벌레처럼 말고 콩나물처럼 곧곧이 서 있었다.

움직일 수도 없이 밀착되어 있어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으니 지하철 광고를 보고 또 본다. 강남의 성형외과 광고의 인형 같은 비현실적인 모델사진을 보며 나도 고쳐야 하지 않나 싶었다. 공무원 합격률이 무균 99%에 가깝다는 숫자를 보며 내가 할 수 없는 직종이 있다면 바로 공무원일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난 움직이지도 못하고 서있을 때 나만의 공부를 했는데, 그건 지하철 노선표에 시선을 고정하고 외우는 일이었다.    

  

서울에 왔으니 어디가 어디인지는 알아야 했다. 학원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길 도중에 갤러리아백화점, 세종문화회관, 코엑스, 시청, 경복궁, 신사동, 인사동 이런 단어들이 나오는데 도대체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어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지방에서 온 티를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주말엔 중심가들을 돌아다녔다. 지하철 방향을 거꾸로 타거나 잘못 타거나 출구를 못 찾아 계단을 올라왔다 다시 내려가는 반복하는 일들을 여러 차례 겪으며 서울 대중교통을 익혀갔다.


명동, 강남, 압구정, 동대문, 종로, 이대, 홍대, 신촌, 혜화 등 관광객처럼 두리번거리며 걸어 다녔다.

명동에서 내렸더니 남대문과 롯데백화점을 걸어서 갈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연예인들이 길거리에 걸어 다닌다는 거리를 구경하러 압구정역에 내렸더니 아파트만 즐비했다. 한참을 걸어가야만 갤러리아 백화점과 로데오거리가 있었고 오렌지족과 연예인 같은 일반인들만 아다녔다. 신촌과 홍대 이대는 걸어가다 보면 지리상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하철이 가장 편하고 안전하게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버스를 타거나 걷는 것은 엄두도 못 냈었다. 무조건 지하철역으로 가서 목적지역으로 가야 했다. 여러 번 다니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은 노선이 다른 지하철 역들이 지상에서는 서로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조금만 걸어가도 되는 거리인데도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을 가거나, 갈아타는 수고를 했다는 걸 알았다.

방송에서 부산에서 온 연예인이었는데 10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지하철로 30분이 걸려 몇 달을 다녔다는 에피소드를 듣고 난 격하게 공감했다. 나도 그랬으니깐.


나는 물건, 사람 구경 하는 게 즐거워 물 만난 고기처럼 서울을 휘젓고 돌아다녔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한 곳은 동대문이었는데, 새벽시장의 활기와 디자인이 독특한 옷들을 하나씩 발견하는 재미로 친구들과 자주 다녔다. 제일평화시장은 거리나 백화점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옷들이 많았다. 일본잡지에서나 보 옷과 액세서리가 즐비했다. 신세계였다.     


그동안 내가 살았던 곳은 모두 지상에서만 움직였지 지하로 계단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계단이라고는 학교, 살던 집 빌라만 오고 갔고 버스를 타고 지상의 풍경들만 보고 살았다.

도시에서는 수많은 빌딩을 오고 가기 위해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지하철로 지상과 지하의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수시로 오르락내리락했다. 목적지까지 걷는 일이 일상인 도시는 살이 찔 틈이 없어서일까. 날씬한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걸어 다녔다.


넓고 넓은 서울에서 내가 과연 자리를 잡고 성공을 할 수 있을지. 원하는 회사에 취직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도 모아서 외국에도 가보는 소망을 가졌다. 다시 출근길과 버금가는 퇴근길 지옥철을 타고 지상으로 올라오면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다시 골목 사이사이를 돌고 돌아 집을 향해 갔다. 그래도 내가 서울 하늘아래 누울 방한칸이라도 있다는 거에 만족했다.



                                                                                                                       

주말이면 나처럼 서울에 올라온 친구들끼리 모여 신림동 순대타운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순대곱창에 소주 한잔을 하며 서울살이의 고단함을 풀어놓았다. 가끔 내 방에 친구들은 올 때마다 말했다.       

“그 집이 그 집 같고만, 나는 혼자는 못 찾아오겠다 ”

결국 친구들이 올 때면 내가 큰길까지 나가서 데리고 와야 했다

우린 부모의 허락이나 감시 따위가 없는 서울에 왔기 때문에, 놀고 싶을 때 놀고 집에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이러려고 독립을 한 거 아닌가. 친구 자취방 근처에서 놀다가 언제나 친구집에서 자고 다니는 것이 당연했다. 지하철 시간이 끊어질까 봐 조급해할 이유도, 택시를 타고 갈 만큼 돈도 없을뿐더러 갈 이유도 없었다.


신세한탄이 길어진 날, 지하철 끊기고 나의 방한칸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나를 포함해 3명의 친구들을 이끌고 술을 마신 번화가에서 미로골목을 돌고 돌아 나의 방으로  이동했다.

바닥에 있는 것들은 위로 올려두고 내부반처럼 누워 보았다. 세로로 3명이 딱 붙어 누울 수 있었다.

1명은 결국 발밑에 가로로 누웠는데 친구의 발이 문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날은 문을 열고 잘 수밖에 없었으며 내 방한칸의 최대수용인원은 문을 닫고 자지 않는다면 4명까지 가능하다는 한계치도 알게 되었다.   

   

신림동의 방한칸에서 몇 개월 살았지만, 그때 알았다.

지하철입구에서 더 멀수록, 골목을 많이 걸을수록, 방이 작을수록, 밖에 화장실을 이용해야 할수록, 불편할수록 방은 싸다는 것을.      

햇볕도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서울땅에서 사람이 지하에 산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서울은 창의적인 도시답게 획일화된 아파트를 지어 더 많은 사람이 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지하까지 파내어 방을 한 칸이라도 만들었다. 자신형편에 맞게 어디든 살 수 있도록 선택할 수 있게 만든 서울의 배려였다.


창문으로 햇볕이 들어오고 직진으로 걷는 방으로 이사 가기 위해서, 나는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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